[김희철의 전쟁사(73)] 미공군 500회 폭격으로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단 14회로 폭파시킨 한국공군(상)

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12.26 15:50 ㅣ 수정 : 2020.12.26 19:23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시절의 백범 김구,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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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시절에 이미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 혜안의 영향을 받은 차남 김신은 1937년 일본 공군이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공군 조종사가 돼 조국 독립에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인 김구 주석과 함께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비밀연락 임무 등을 수행하면서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은 1944년 중국 공군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47년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하며 조종사의 꿈을 이뤘다. 귀국 이후엔 육군항공대에서 활동하며 1949년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으로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인물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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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백범 김구선생이 38선 경계표식에서 찍은 사진으로 좌측이 비서인 선우진, 우측이 김구 선생이 매우 아꼈던 차남인 김신으로, 일찍 죽은 형 김인을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일을 수행했으며 해방 후에 아버지 따라 북한을 방문할 당시와 훗날 공군총장(예비역 중장, 향년 94세였던 2016년 5월에 숙환으로 별세) 시절의 모습.[자료출처=국가보훈처/공군본부] 

 

6·25남침전쟁 때 한국 공군으로 첫 출격한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중령

 

아버지인 김구 선생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김신은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하고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됐다. 

 

비록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한 뒤에도 조모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하여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면서 군사 교육 및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를 했는데, 당시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 항공사령관 이영무 대령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 그들은 대한민국 공군 발전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의해서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 10인의 요원으로 선발된다. 당시 그는 중국군-미군 유학과정에서 무스탕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러 갔을 때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공부했던 무스탕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고 한다.

 

그는 공군 조종사로 6·25 남침전쟁 초기에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 문제를 생각한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로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도 참가했다. 영화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이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도 김 장군은 정치관이 확고해 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기술관료의 자질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공군총장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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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6일 미 공군으로부터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조종사들이 미군 교관으로부터 조종 교육 등을 받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신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다섯번째와 우측 사진이 故 이근석 대령으로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시 산화해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이다. 공군은 2008년 7월3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이날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사진출처=공군본부/보훈처]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 대령, 한국공군 단독으로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성공

 

당시에 전투기가 한 대도 없던 우리 공군은 미군이 제공하는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 고(故) 이근석 대령을 포함한 10명의 인수요원을 선발했다. 

 

김신 중령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의 인솔하에  장성환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김영환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 등 선발된 인수요원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김신 중령은 일본에서 인수받은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해 귀국한 다음날인 7월 3일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백범의 아들이기 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 걸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첫 비행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단장이었던 이근석 대령은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를 맞았다. 그는 대공포에 엔진이 명중되자 탈출하기는 커녕 적군 전차부대 한 복판으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했다.( [김희철의 전쟁사(4)] '조종사의 날'을 만든 한국판 가미가제, 고(故) 이근석 장군’ 참조)

 

이때 이 대령은 “3번기 왼쪽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이같은 희생적 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로 기록됐다. 이근석 대령은 나중에 태극무공훈장 수훈과 함께 장군으로 추서됐으며, 공군은 58년이 지난 2008년에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비행한지 몇 일만에 최고참 이근석 장군의 전사로 한국공군은 단독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도 쫓겨났다. 사천 비행장의 부족한 활주로로 인한 이착륙의 어려움은 감수하더라도, 한때 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오면서 위태롭기도 했었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들이 대량 육성되어 F-51 무스탕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공군의 단독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 토벌을 통해 작전능력 향상과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김신 중령도 1951년 10월까지 공중전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회 출격하며 지리산 공비 토벌 항공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김신은 고참이 되면서 직접 비행을 통한 전투 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으나 전투 의지는 매우 강했다.

 

특히 1952년 1월, 김신 대령이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 유엔군이 500회 넘게 출격하면서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을 지휘해 한국공군 단독으로 성공함으로써 우리 공군의 위상을 높힘과 동시에 전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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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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