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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과 한림대 ‘인술(仁術) 공헌 50년’ ② 한강에서 인술의 기적을 일구다

이상호 전문기자 | 2019-11-15 06:11 등록 (11-15 06:11 수정) 1,266 views
학교법인일송학원 48년 발자취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 1921~1996)이라는 선구자이자 개척자가 있었기에 오늘날 ‘의료한류(醫療 韓流)’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일송 윤덕선과 윤대원 이사장, 2대에 걸친 일송학원의 역사, 현재의 모습,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의 비전을 통해 한강에서 시작한 작은 인술의 씨앗이 지구공동체를 움직이는 의료봉사의 기적이 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 일송의 삶은 주촛돌 정신으로 표현된다. 1992년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는 일송 윤덕선 [사진=한림대의료원]

[뉴스투데이=이상호 전문기자] 샛강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1971년 12월18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94 한강변에서 한강성심병원(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 개원식이 열렸다.

한강성심병원은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으로 대지 1,200평에 연건평 3,000평과 250병상을 갖춘 9층 규모의 최신식 병원이었다.

일송 윤덕선의 삶과 한국 의료사에 있어서 한강성심병원의 개원은 큰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곳에 병원을 지어 그가 꿈꿔 온 인술의 실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료사의 큰 획...한강성심병원 개원

그때까지 서울의 종합병원은 강북에 몰려 있었다. 서울대병원과 신촌세브란스병원, 명동성모병원, 백병원 등등.

대학 부속병원은 대학의 위치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백병원 등 대형 종합병원은 사람이 많은 강북에 있어야 돈이 되는 시절이었다.

지금의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영등포 일대는 그나마 한강 이남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빈민가였다.

1960년대부터 대한민국의 인구는 급속히 서울로 몰렸고, 영등포는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거주하는 서울의 변두리였다. 1971년 서울 인구가 553만명이었는데, 서울의 9개 구중 영등포구의 인구가 131만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지역,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있는 변두리가 병원 하나 없이 의료체계의 사각지대로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립 영등포병원은 의료장비와 시설이 낙후돼 현대화를 막 시작하려던 시점이었다.

일송 윤덕선이 영등포에 집착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명동이나 필동 등 서울 도심 병원까지 힘들게 찾아오는 모습을 줄곧 봐왔기 때문이다.

보건 및 사회보장체계가 극도로 미비했던 1960년대 대다수 서민, 특히 영등포 일대 빈민들은 각종 질병과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일송은 이미 1968년 10월부터 자신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한국의과학연구소를 통해 영등포 지역 주민들의 영양 및 질병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돈벌이가 아닌 인술(仁術)로서의 의술, 병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사명감과 의료산업의 미래를 보는 일송 윤덕선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또한 평양고보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인생의 좌우명인 ‘주춧돌의 정신’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 한강성심병원의 개원은 한강 의료사의 큰 사건이었다. 개원 초창기 한강성심병원 모습 [사진=한림대의료원]

“꼭 필요한 곳에 병원이 있어야”...의료사각 지대 영등포 ‘고집’

‘성심(聖心)’은 일송 윤덕선이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병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그와 인연이 닿은 병원마다 붙인 이름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윤덕선은 1945년 고향인 평남 용강, 월남 후 처음 자리를 잡았던 충남 홍성에서 20병상 규모의 ‘성심의원’을 개원한 바 있다. ‘성심’은 주출돌 정신과 더불어 희생과 봉사, 헌신의 맹세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 의료사에 큰 획을 그은 한강성심병원의 개원은 쉽지만은 않았다.

한강성심병원 개원 3년 전인 1968년 5월, 일송은 그전까지 일하던 가톨릭의과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함께 했던 동료 13명과 함께 ‘사단법인 한국의과학연구소’를 창립하고 6월에 서울 중구 필동에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속 성심병원을 개원했다.

‘필동 성심병원’, ‘성심병원’으로 불렸던 이 병원은 대학 부속병원이 아닌, 첫 민간 종합병원이었는데 연건평 1,500평에 200병상, 최신 장비를 갖춰 언론이 ‘매머드병원’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이 병원의 공보담당자였던 민병근 박사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타성과 모순점을 개선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며 “중앙병리검사소가 있어 영세 의원들에게 병리검사를 개방하고 영세민들에게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윤덕선 박사가 직접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명동성모병원에 이어 필동성심병원까지 자리를 잡아가자 일송은 의료계에서 “병원경영의 귀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오랫동안 겪었던 대학병원의 여러가지 불합리한 요소, 낭비적인 시스템을 개선한 때문이었다.

필동성심병원은 당시 병원이 없어서 의과대학을 만들 수 없었던 중앙대학교의 제휴요청을 받아들여 ‘중앙대학교 부속 필동성심병원’으로 변신했고, 일송은 중앙대학교 의료원장을 역임하는 등 중앙대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 대학병원 불합리 시스템 개선... ‘병원경영의 귀재’ 별명

이무렵 윤덕선 박사의 마음은 이미 영등포에 한강성심병원을 설립하는데 가 있었지만 한국의과학연구소 임원들은 반대가 심했다. 필동성심병원에 부채가 많고 영등포 같은 변두리 지역에 병원을 지으면 수익이 나빠질 것을 우려했지만 일송은 1970년 초부터 부지를 물색학고 다녔다.

그러던 중 서울시가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이병주에게 불하한 영등포동 하천부지, 한강변 모래벌판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건축비 조달이었는데 당시 실적이 좋지 않았던 한일개발 조중훈 사장이 외상으로 병원을 지어 주겠다고 나서 해결됐다.

함께 참여하기로 했던 명동성모병원의 중진급 교수들이 병원 측의 만류로 도중에 주저않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어떤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딛고 일어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인생의 요체”라고 다짐하면서 한강성심병원을 만들어 냈다.

의료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어떤 의사가 대학병원에서 독립해서 자기 병원을 차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에대해 의료업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병원이 대학병원 위주로만 발전했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를 한국 의료 수준은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또한 대학병원은 근본적으로 연구중심이어서 인술이나 봉사, 자선이라는 철학은 없다.”고 말한다.


◆ 일송의 삶과 함께 한 인술과 봉사,헌신


윤덕선 박사의 인술을 통한 봉사는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삶 그 자체였다.

1961년부터 명동성모병원(가톨릭 중앙의료원)의 신축과 병원 중흥에 앞장섰던 일송은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시골병원을 찾아가 무료진료를 했다. 교수와 전문의를 백령도, 연평도 같은 오지에 파견하고 나병 요양원도 찾았다.

한강성심병원을 개원한 뒤에는 인술을 통한 봉사가 더욱 활성화 됐다. 1971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따른 보건사업으로 무의면(無醫面) 일소대책을 내놓았다.

전국적으로 630개면에 의사가 없는 실정에서 보건지소를 신설하고 구급차량을 보강해 순회진료를 강화하기로 했다. 서울시도 영등포 같은 변두리 지역 영세민을 위해 시립병원 의료진으로 순회진료를 시작했다.

한강성심병원은 민간병원으로 개원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1972년 4월부터 당시 영등포구 사당동을 시작으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 1970년대 한강겅심병원의 순회 무료진료 모습 [사진=한림대의료원]

“한강성심병원은 의사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병상에서 신음하는 영세민들을 위해 무료순회 진료차를 마련, 4월 22일부터 5월5일까지 15일동안 영등포구 8개 지역에 집중적으로 치료해 줄 계획이다...사업을 확장하여 필요에 따라 무료수술까지 해줄 계획이다.” <매일경제. 172년 4월 19일자 기사>

“한강성심병원은 영등포 관내 59개 동을 대상으로 한 무료순회진료 사업을 마쳤다. 그동안 진료요원 9명을 동원, 3,400여명의 주민들을 진료했다” <동아일보. 1972년 7월27일자 기사>

이 무렵 영세민들의 의료혜택이 얼마나 취약한 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972년 8월 만삭의 임산부가 입원비가 없어서 5개 병원을 전전하던 끝에 사산을 하고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또 중화상을 입은 3살짜리 아이가 7곳의 병원에서 치료를 거절당해서 숨지는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노인이 치료비 때문에 입원을 거절당하는 사건까지 더해졌다.

언론에서는 “인술을 저버린 냉혹한 비정” “비정 인술 쇼크”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느냐”며 의료계의 비윤리를 질타했다.

결국 경찰이 10개 병원 의사 12명을 입건해 6명에게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당시 대형 병원에서는 진료비를 못내는 응급환자를 받을 경우 치료를 맡은 당직의사의 월급에서 치료비를 공제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한강성심병원은 1972년 8월 서울시와 협조해 영등포구 봉천동에 ‘새마을보건진료센터’를 개설했다. 서울시가 건물을 제공하고 한강성심병원이 운영비를 대서 무료진료를 펼친 것이다.


◆ 새마을운동과 발맞춰 펼친 무의촌 진료사업


1961년 3월, 가통릭대학 명동 성모병원 교수였던 윤덕선 박사는 20명의 의료팀을 구성, 서해의 고도 백령도를 찾아 하루평균 200명의 섬 사람들을 호별 로 방문해서 무료 진료와 치료를 한 바 있다.

1973년 1월부터, 개원 1년을 갖 넘긴 한강성심병원은 매년 동계와 하계로 나눠 무의촌을 찾아 무료진료를 했다.

무의촌 무료진료를 처음 나간 곳은 충남 천원군 수신면 일대였는데, 당시 11명의 진료팀은 403명의 주민들을 진료하고, 110만원이 넘는 약품비를 집행했다. 당시 자장면 한그릇 가격이 80원 정도였으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 1981년 문을 연 신림종합복지관과 중 고교생 장학금지원 모습 [사진=한림대의료원]

1974년 6월 윤덕선 박사는 한국의과학연구소 및 필동성심병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한강성심병원에 몰두하기 위해 성심중앙유지재단이라는 의료법인을 설립했다. 이로써 일송이 어릴적부터 다져온 주춧돌 정신과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술, 봉사와 헌신은 더욱 본격적으로 실천됐다.

첫 사업은 1975년 2월18일 국내 최초의 민간 자선병원인 ‘성심자선병원’이 문을 연 것이다.


◆ 한강성심병원안에 첫 민간 자선병원,‘성심자선병원’ 개원


윤덕선 박사의 절친한 친구이자 15년동안 백령도에서 고아원, 병원, 결핵요양원 등 구호사업에 헌신한 선교사 마펫트 (Alfred J. Moffett) 신부가 초대 원장을 맡아 한강성심병원의 증축 공간에 자선병원을 만들었다.

민간병원이 돈을 더 벌기 위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병상이 무려 100개에 달하는 무료병원을 짓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윤덕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심중앙유지재단은 연구 및 복지사업을 관장할 조직으로 1975년 1월 ‘인간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두달 뒤 나병(한센병) 환자를 구원하는 모임인 ‘천주교 구라회’를 인수해서 지방 곳곳의 나환자촌에 순회진료단을 파견했다.


◆ 미국 괌 마리아메디컬센터 운영...민간병원 첫 해외진출


윤덕선 박사가 갖고 있는 대형 병원의 효율적인 운영에 대한 노하우는 성심중앙유지재단이 미국령 괌의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마리아나메디컬 센터의 운영을 맡음으로써 입증됐다.

1970년대 인구가 30만명 정도였던 마리아나 제도에는 종합병원이 없었다.

▲ 마리아니메디컬센터 모습과 개원식 후 윤덕선 박사와 마페 신부 [사진=한림대의료원]

마리아나케디컬센터는 1974년 착공됐는데, 자금사정과 의료인력 등의 문제로 1975년 말에 공사가 중단되자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윤덕선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한강성심병원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금융회사의 대출이 살아났고, 성심중앙유지재단은 10년 간 이 병원을 운영하는 계약을 맺었다.

1976년 12월 6일 괌에서 마리아나메디컬센터 개원식이 열렸는 데 우리나라 민간병원이 해외에 처음으로 진출한 쾌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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