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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과 한림대 ‘인술(仁術) 공헌 50년’ ③ 2대에 걸친 인술과 봉사의 길

이상호 전문기자 | 2019-11-19 06:28 등록 (11-19 06:28 수정) 776 views
▲ 학교법인일송학원 윤대원 이사장은 선친 윤덕선 박사에 이어 2대째 인술과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사진제공=한림대의료원]

학교법인일송학원 48년 발자취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송(一松) 윤덕선(尹德善, 1921~1996)이라는 선구자이자 개척자가 있었기에 오늘날 ‘의료한류(醫療 韓流)’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일송 윤덕선과 윤대원 이사장, 2대에 걸친 일송학원의 역사, 현재의 모습,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의 비전을 통해 한강에서 시작한 작은 인술의 씨앗이 지구공동체를 움직이는 의료봉사의 기적이 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이상호 전문기자] 1970년대 일송 윤덕선과 성심중앙유지재단은 한강성심병원을 기반으로 한 인술 실천, 성심자선병원과 새마을보건진료센터의 무료 순회진료 등을 통해 의료복지 확대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의료보험 등 보건복지 혜택이 전무했던 시절, 기독교회나 가톨릭 등 종교단체가 아닌 개인이 의료기관을 설립해 의술과 의료산업을 성장시키면서 국민 의료복지에 기여한 경우는 사실상 전무했다.

평생에 걸친 일송의 인술봉사와 헌신은 한국 의료사를 새롭게 쓴 1971년 개원한 강남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 한강성심병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술과 무료진료, 사회복지로 새 지평 연 일송학원의 1970년대

1976년 성심중앙유지재단의 두 번째 동행병원이 탄생했다. 그해 12월 서울 청량리역 앞에 있는 서울동산병원을 인수, 동산성심병원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어 1978년 10월 서울 신도림동에서 강남성심병원 착공에 들어가, 1980년 1월 개원했다.

1977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1979년 7월에는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까지 의료보험 대상이 확대됐지만, 수혜자는 전체 국민의 20%에 불과했다.

국민 대다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은 여전히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남은 상황에서 한강성심병원과 동산성심병원은 무료진료 및 무의촌 진료, 성심자선병원은 무료진료권 발급으로 의료간극 해소에 노력했다.

성심병원, 한림(翰林)의 날개로 웅비하다

1980년대 초, 일송 윤덕선과 성심중앙유지재단은 한림대학교 설립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큰 걸음을 내딛는다.

1977년 4월 무렵, 일송의 성심중앙유지재단 병원들과 중앙대학교 간의 협력이 중단됐다. 두 기관의 협력은 여성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중앙대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 1899~1977) 박사와 일송의 긴밀한 관계 때문이었다.

이에따라 윤덕선은 인천에 국제의과대학을 설립, 선진국 교수진을 초빙하고 동남아 학생들을 유치해 개발도상국들의 의료수준을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엉뚱한 오해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시절에는 ‘정권의 시혜품’으로 치부되던 대학의 설립은 난항을 겪었다.

1981년 1월 일송은 춘천에 있는 성심여자대학 학장인 김재순 수녀를 만나 당시 춘천캠퍼스 인수에 합의하게 된다.

▲ 한림대 건설 현장을 찾은 일송 윤덕선 박사 [사진제공=한림대의료원]

한 달 뒤, 성심중앙유지재단 직원이 당시 문교부에 ‘성심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설립 계획서를 신청했으나 그 자리에서 반려 당하고 말았다. 기존에 있던 성심여대 성신여대 등과 명칭이 혼동된다는 이유였다.

일송이 그동안 큰 애착을 가져온 ‘성심’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실무자가 이런 상황을 보고하자, 일송은 5분 뒤에 연락을 주기로 하고 학교이름 짓기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학교 이름이 ‘한림(翰林)대학’이었다. 날개 한(翰)은 머리에 아름다운 금색 벼슬이 있는, 빨리, 높이 나는 상상의 새를 의미했다.

이 새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선비를 상징하기도 했다. 결국 한림은 ‘빼어난 인재들이 모인 숲’이라는 의미가 된다. 1982년 1월 8일. 마침내 문교부가 ‘학교법인일송학원’과 ‘한림대학’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했고, 윤덕선 박사는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림대학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입학했는데, 1982년도 첫 신입생의 경쟁률이 3.1대1을 기록해 화제가 됐다. 각 과 학생의 30%를 장학금 대상으로 삼고, 20%까지는 등록금을 모두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장학제도 때문이었다.

1982년 3월 8일, 첫 입학식에서 윤덕선 이사장은 “우리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우리의 뜻을 더 높은 곳에 둡시다. 온 인류의 모범이 될만한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후 학교법인일송학원은 매년 80억~100억원에 달하는 경상비를 투입, 한림대학을 키웠고, 개교 7년만인 1988년 11월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또 1982년 12월에는 춘천시에 있는 춘천간호전문대학(현 한림성심대학교)를 인수해 오늘날의 종합 전문대학으로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장엄했던 일송의 큰 걸음

1996년 1월 일송 윤덕선은 사재 2억원을 강동성심병원에 기부, 대대적인 심장병 어린이 수술에 나섰다. 또 신림종합복지관과 성심복지관은 그해 3월부터 자선진료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996년 2월 낭보가 날아들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1995년 대학종합평가를 발표했는데, 한림대학교가 종합 3위에 올라 교육계와 대학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대학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끝없는 투자만이 있을 뿐이다”는 소신에 따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만든 당연한 결과였다.

일송 윤덕선의 마지막 공식활동도 한림대학교에서 있었다. 1996년 3월 6일 한림과학원의 제 81회 수요세미나에 참석한 뒤 나흘 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 1996년 3월 14일 치러진 일송 윤덕선 박사 영결식 [사진제공=한림대의료원]

일송은 숨지기 4년 전에 발간된 수상집 ‘숨은 거인의 길’에서 유언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화려하고 장대한 무덤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죽으면 화장도 좋고, 의대생 실습에 써도 좋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왔는데, 생전 그로부터 무료수술 등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맹인점자도서관에서 도움을 받았던 시각장애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14일 오전 11시. 한림대학교 체육관에서 있었던 고별식에서는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대학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육성이 흘러 나왔다.

최영희 한림대 사학과 교수는 조사에서 “윤덕선 박사는 그 이름과 같이 평생 이 사회에 덕과 선을 베푼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2대에 걸친 봉사와 헌신의 길...윤대원 학교법인일송학원 이사장

윤대원 학교법인일송학원 이사장은 1945년 6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일송 윤덕선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아버지 윤덕선 등 가족이 공산당을 피해 월남, 윤대원 이사장도 충남 홍성에서 6·25전쟁의 포화와 보릿고개 속에서 힘든 유아기를 보냈다.

서울수복 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한 윤대원은 용산중·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모친이 아닌 고모의 설득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함으로써 2대에 걸친 인술과 헌신, 봉사의 길을 선택했다.

▲ 1977년 윤대원 이사장의 가톨릭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식 때 함께 한 부모님 [사진제공=한림대의료원]

의사이자 병원 경영자로서 윤대원 이사장의 삶은 아버지 윤덕선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고, 숙명이었다. 전공의 수련시절 백령도를 비롯한 오지에서 진료활동을 펼쳤으며, 의사가 된 뒤에도 한강성심병원과 성심자선병원 순회무료진료팀의 단골 멤버로 활약했다.

윤대원 이사장은 유능한 외과의사였다. 1969년 국내 첫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이용각 교수 아래서 수련한 그는 선천적 기형이나 까다로운 수술을 수 없이 집도했는데, 보통 10시간 정도 걸리는 췌장 수술을 4시간만에 끝내는 등 타고난 소질을 보였다.

1985년 윤대원 교수팀은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해 한림대학교의료원 역사에 신기원을 이뤘고, 1987년 5월에는 국내 최초로 췌장이식 수술에 성공해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송이 벌여놓은 보건의료와 종합복지를 결합하는 일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열기 속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해지면서 한림대학교와 부속병원에서도 농성이 벌어지는 등 몸살을 앓았다.

윤대원 의료원장 겸 의무부총장은 이런 상황을 어렵게 수습하고, 1989년 11월 학교법인일송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취임하자 마자 두세 차례나 죽음의 고비까지 넘기는 병마와 마주쳤다.

그러던 1996년 3월, 평생 자신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던 거목, 아버지 일송 윤덕선이 세상을 떠났다. 윤대원 이사장은 후에 당시의 심정을 “그냥 죽을 것인지, 일하다 죽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그에게 첫 시험대가 됐지만 1999년 3월 평촌에 한림대학교성심병원을 개원했다. 2000년 3월에는 한림대학교 부설 안양복지관, 10월에는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경영난으로 병원 건립이 취소 또는 연기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렸고, IMF 사태로 인한 고통을 나누기 위해 노숙자, 영세민, 결식아동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나갔다.


21세기 세계화 비전,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 제시


윤대원 이사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화시대에 발맞춘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을 주창했다. 2004년 협약을 맺은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코넬대학교와 파트너가 되고, 뉴욕 프레스비테리안병원(NYPH)과도 인적교류를 이어 나갔다. 2008년에는 ‘ECO 한림 환경경영’을 선포했다. 인간과 지구의 근본적인 관계를 고민하면서 지구 건강에 공헌하는 환경경영에 나선 것이다.

윤대원 이사장은 1996년 10월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로 해외의료봉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려, 국내를 넘어 해외로 인류애를 실천하자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일송학원은 2007년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와 함께 국제협력 사업을 펼쳐 나갔다.

이라크를 시작으로, 베트남, 케냐, 파라과이, 라오스, 카메룬 등으로 사업이 이어졌고 2011년에는 한림화상재단과 함께 아시아 저소득 국가 화상아동 치료사업도 전개했다. 2019년 4월. 학교법인 일송학원은 ‘마이티 한림 4.0(Mighty Hallym 4.0)’을 통해 10년 뒤를 밝히는 ‘2028 마이티 한림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 비전을 선포했다.

▲ 2019년 4월 23일 Mighty Hallym 4.0 비전선포식에 참석한 윤대원 이사장과 국내외 귀빈들 [사진제공=한림대의료원]

이날 대회사에서 윤대원 이사장은 ‘응전자’이자 ‘승리자’가 될 것을 당부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결코 패자가 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현실주의와 적극적 개방성, 불굴과 신념의 의지를 가진 응전자가 되자”고 주문했다.

윤 이사장은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영국의 존 던(John Donne) 신부가 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언급하면서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종”이라며 인류에 대한 애정과 사람,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다.

2대에 걸친 인술의 실천, 희생과 헌신의 유전자,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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