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디플레이션(물가하락) 공포가 글로벌 경제를 덮치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등 주요 국가들이 앞다퉈 금리인하를 통한 양적완화 정책을 수년째 고수하고 있지만 경기는 좀체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물가상승률이 제로에 머물거나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계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디플레이션 위험에 빠졌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역시 계속된 금리인하와 소비세 인하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미동조차 없다. 물가상승률은 수개월째 0%대에 머물러 이러다가 자칫 일본판 ‘잃어버린 10년’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디플레 위기
디플레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 하반기부터다. 주요국가들의 경제성적표가 부진한 가운데 국제 원자재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디플레 시대를 여는 서막이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엎친데 엎친격으로 최근 중국 중시 폭락을 계기로 중국경제의 경착륙 가능성이 커지자 디플레 공포는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월드와이드 인베스트먼트의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CIO) 도미닉 로시는 2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세계 경제가 신흥시장 위기에 따른 3차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2008~2009년 미국의 부동산 시장 붕괴와 뒤이은 세계 금융위기(1차), 2011~2012년의 유로존 채무위기(2차)에 이어 이번에는 신흥시장 경기둔화로 인해 3차 디플레 위기가 닥칠 것이란 우려다.
실제로 세계 각국이 수년간 엄청난 규모의 돈을 시장에 풀었는데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소비자물가는 여전히 제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 2분기에 전년 동기대비 기준으로 0%를 나타냈다. 특히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 상승률은 올 상반기에 계속 1.3%를 유지했으나 지난 7월에는 1.2%를 기록, 2011년 3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스페인(-0.3%)과 스웨덴(-0.2%), 스위스(-1.1%) 등이 2분기에 마이너스 물가를 기록했다. 영국의 CPI 상승률도 2분기에 0%로 떨어졌다. 작년 4분기와 1분기의 0.9%, 0.1%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시장에 무제한 돈을 풀겠다는 일본 역시 올들어 벌써 세번째 월별 근원 물가가 사실상 0%를 기록했다. 싱가포르와 태국, 대만, 그리스, 이스라엘 등도 2분기 기준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 원자재값 폭락에 베네수엘라 등은 살인적인 물가상승률 기록
주요국가들이 디플레 공포에 휩싸인 반면,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 러시아 등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물가상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하루가 다르게 생필품 값이 뛰자 주요 물자가 아예 시장에서 자취를 감춰 시민들은 날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다. 주요 수입원인 원유값 하락으로 통화가치가 폭락, 물가폭등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는 국영 마트에 물건을 사러갔던 80대 할머니가 밀려드는 인파에 깔려 압사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찰이 최루탄까지 쏘며 질서 유지에 나섰지만 서로 물건을 차지하려는 시민들의 아귀다툼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베네수엘라는 공식적으로 물가상승률은 밝히지 않는다. 블룸버그 통신이 예상한 올해 인플레는 72.3%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미국 워싱턴의 정책연구기관 케이토 인스티튜트에서는 지난 28일 베네수엘라의 올해 인플레율이 808%에 이르고 생활비 상승률은 연 722%에 달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추정을 내놨다.
세계 주요 도시의 생활물가를 비교하는 사이트 익스파티스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치약은 1만원, 샴푸는 4만1000원, 계란한판은 1만7000원 수준에 거래되고 있지만 그나마 물건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베네수엘라와 함께 아르헨티나, 러시아, 우크라이나도 경제 파탄에 이은 물가 급등으로 사회분위기가 흉흉하다.
특히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 제재와 유가 하락이 겹치면서 경제가 급속히 악화돼 물가상승률이 올들어 1분기 16.2%, 2분기 15.8%를 기록했다. 특히 루블화 약세로 터키나 남미에서 수입하는 과일이나 채소 등 수입 식품 가격이 크게 올라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 한국 물가상승률 9개월째 제로 수준, 그 많은 돈 어디로
한국의 경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8월까지 9개월째 0%대를 나타냈다. 기준금리가 작년 말 2%에서 올해 6월 1.5%까지 낮아지고 가계부채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며 시장에 엄청난 돈이 풀렸음에도 현실은 물가가 오르기는커녕, 디플레 우려가 커지고 있다. 디플레가 실제로 현실화할 경우 부동산과 주식가치가 하락하고, 민간소비 기업생산 일자리 등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무엇보다 디플레는 투자와 소비 위축에 따른 장기불황의 불씨가 된다. 채무자 입장에선 빚 상환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대공황, 199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디플레에서 비롯됐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8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0.7% 오르는 데 그쳤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0.8%로 내려앉은 이후 9개월 연속 0%대다. 실질적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를 밑돌면 디플레로 간주한다.
문제는 경기를 부양하고자 정부가 금리인하를 단행하고, 낮아진 금리를 틈타 담보 및 신용대출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경기진작도, 물가상승률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시중에 돈이 풀리면 소비가 늘어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호전되는 것이 보통인데, 최근의 상황은 풀린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는게 큰 차이다. 시중에 풀린 돈이 부동산이나 금융권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얘기다.
최재성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한국은행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최근 6개월 동안 소득 6000만원 이하 중․저소득 가계의 은행대출은 2조4000억원 증가하였고, 소득 3000만원 이하 저소득 가계의 비은행금융기관 대출은 1조원 증가했다. 고소득 가계는 은행의 저리 이자로 대출을 받고 있는 반면, 저소득 가계는 비은행 금융기관의 고리 이자로 대출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리로 조달한 자금은 생활자금으로 쓰이거나 기존의 이자 돌려막기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돈이 풀려도 소비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금융권 안에서만 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9월 미국 금리인상설에 영향 미칠까, 한국 본격적 디플레 대비해야
디플레 우려로 인해 미국의 9월 금리인상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커지고 있다. 도쿄 소재 미즈호 자산운용의 이코 유스케 펀드매니저는 블룸버그를 통해 정책 담당자들에게 위험 요인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며 이는 수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연준의 금리인상은 '섣부른 조처'가 될 것이라면서 만약 9월이나 12월에 금리 인상에 나선다면 다시 정책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일부 전문가들은 비관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한국이나 유로존, 중국은 물론 대부분 국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해부터 2017년사이 마이너스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했다. 본격적인 디플레가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를 덮칠 것이란 공포가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우리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41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 9개월 연속 0%대 소비자물가 상승률, 5분기 연속 0%대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을 뜻하는 디플레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비슷한 ‘잃어버릴 10년’이 한국경제의 당면한 미래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결국 믿을 것은 내수 뿐인데, 지금처럼 가계빚이 많아 개인의 가처분소득이 낮은 상황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백약이 무효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가계빚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디플레를 막을 마지막 열쇠일지 모른다.
<이진설>경제전문기자=wateroh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