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시계의 태엽을 아주 오래전인 1920년대로 돌려보자.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주인공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신다. 주인공의 아내는 동경유학까지 갔다온 지식인 남편이 돈벌이는 안하고 술에 절어 사는 이유를 모른다. 남편은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해 술에 의존해 삶을 살아간다. 소설 말미에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집을 나가버리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절망적인 어조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며 탄식한다.
술이 아니라 빚을 권하는 사회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들은 어떨까. 술보다 더 무서운, 빚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부가 나서 안심전환대출이다 뭐다 해서 이자가 싼 빚을 권한다. 한편에선 부동산규제가 풀리고, 은행이자는 싸지고, 여기에 돈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들까지 가세하면서 가계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현재 가계빚은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다.
가계대출에 판매신용을 포함한 가계신용 잔액은 이미 1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도 문제지만, 가계부채의 위험성은 세계 7위에 해당한다. 오죽했으면 맥킨지글로벌연구소(MGI)가 한국을 네덜란드, 캐나다, 스웨덴, 호주,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가계부채 잠재적 취약국가로 분류했을까.
그런데도 정부는 ‘큰 문제가 없다’고 자신한다. 이틀전 이주열 한국은행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의 5월 기준금리 결정 정례회의 이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가계부채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본다”면서 “다만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라고 말했다. 가계부채는 아직 견딜 만 하지만, 그 속도는 우려스럽다는 다소 어정쩡한 입장을 보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가계빚 속도 너무 가파르다
한국은행이 내놓은 4월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4월말 현재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579조1000억원으로 한달전보다 무려 8조5000억원이 증가했다. 이는 관련통계가 작성된 2008년이후 최대규모 증가액이고 작년 같은달 증가분(2조1000억원)과 비교하면 4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부는 주택거래와 맞물려 일시적으로 가계빚이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 지난달 아파트 거래량은 1만3900건으로 평소 4월 거래량인 7200건의 2배 정도 늘어났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가구들
문제는 가계빚의 질이 갈수록 안좋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계빚이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상환능력에 있다. 빚이 많아도 상환할 능력이 충분하다면 양질의 빚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불량빚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자산을 다 팔아도 빚을 갚기 힘든 한계가구는 금융부채 보유가구의 12.5%인 137만 가구에 달한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안심전환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데도 이를 포기한 가구가 80만을 넘는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안심전환대출은 기본적으로 분할상환을 촉진하는 대출제도이다. 이자만 갚다가 한꺼번에 상환이 몰려 다수의 차입자가 원금상환을 못하게 되면 은행부실로 이어지고 그로인해 금융중개 기능이 악화될 것에 대비, 싼 이자로 갈아타게 해주는 대신 원금을 분할해서 상환하는 상품으로 유도해 점진적인 부채축소를 꾀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하지만 안심전환대출 요건에 부합함에도 이를 신청조차 못한 계층이 있다는 것은 이들 가구가 분할상환 여력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자를 내기도 빠듯한데, 어느 순간 원금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게되면 이들은 그야말로 나락에 빠지게 된다. 은행대출이 막히면 제2금융권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고, 연이자 34%에 달하는 고금리를 쓰는 순간, 이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금조달 능력이 취약한 저소득층, 자영업자, 다중채무자들은 그야말로 수미터 높이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가계빚이 몰고올 재앙
가계빚은 비단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계빚으로 인해 개인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들게 되고, 이는 다시 경기침체로 연결되어 경제의 악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빚이 있는 가구가 1년간 갚은 원리금은 1174만원에 달한다. 연봉 4000만원을 버는 가구의 경우 원리금을 빼면 실제로는 2900만원이 안되는 돈을 벌었다는 의미다.
개인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 역시 작년말 기준 138%에 달한다. 개인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1년간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으로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1년간 번 돈을 모두 쏟아부어도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부동산거품 꺼지면 중산층까지 몰락가능성
부채상환능력이 어느정도 있는 중산층도 안심할 수 없다. 현재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원금상환용 대출은 전체의 30%를 넘지 않고 있다. 제2금융권으로 가면 이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싼 이자만 내고 있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뿐, 원금상환 압박을 받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부동산 매매가 활기를 띄면서 빚을 내 집을 사는 현상이 가속화할 경우 또다른 부동산거품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경제는 이미 수차례의 부동산거품을 겪었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는 것을 경험법칙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도 부동산거품이 일어나게 되면 이미 한계수위에 다다른 가계빚 폭탄과 맞물려 그 후유증은 짐작하기 어려운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이 자명하다. 주택보급율이 100%를 넘은 상황에서 집은 더 이상 재산증식의 투자대상이 아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집사기를 포기했고, 인구감소로 머지않은 미래에 주택시장은 공급과잉 현상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나서 빚을 내 주택을 사라고 유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적을 낼 수 있는 당장의 경기부양을 위해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것과 다를게 없다는 지적이다.
1920년대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탄식했던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 아내가 지금 살고 있다면 정부를 향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이진설 경제전문기자 wateroh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