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단테,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3대 시성으로 꼽히는 요한 볼프강 괴테의 첫 번째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은 25세의 나이였던 괴테가 불과 7주만에 써내려간 편지형식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Charlotte)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베르테르의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다. 그 자신 역시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했다가 실연의 상처를 갖고 있는 괴테의 자전적 소설로 유명하다.
뜬금없이 괴테의 소설을 왜 꺼내느냐 하면 요즘 경영권을 놓고 골육상쟁식 ‘형제의 난’을 벌이고 있는 롯데그룹의 상황과 소설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롯데라는 기업이름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로테의 애칭 로테(Lotte)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은 젊은시절 작가지망생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5남5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40년대초 유학길에 올라 일본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지금의 와세다대학 이학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1946년 졸업 후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밀항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이때만 해도 작가지망생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문학 대신에 사업가의 길을 걷게된다. 1948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그해 일본에서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베르테르가 죽으면서까지 사랑했던 여인 로테가 일본에서 재벌기업의 시초로 재탄생한 것이다.


■ 절대강자 없는 롯데오너일가 형제의 지분경쟁
그런 롯데그룹이 요즘 ‘형제의 난’으로 시끄럽다. 지난 1월 장남 신동주 전 일본롯데 전 부회장이 주요 보직에서 밀려나면서 차남 신동빈 회장이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굳어진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 신 전 부회장이 장녀이자 누이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손잡고 일본에서 경영권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일일천하’로 끝나면서 잠잠하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를 보면 이번에 쿠데타의 무대가 됐던 일본 롯데홀딩스가 롯데호텔을 통해 롯데쇼핑을 비롯한 한국롯데의 주요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롯데호텔은 핵심 계열사인 롯데쇼핑의 지분 8.83%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롯데호텔의 주식은 일본 롯데홀딩스(19.07%)를 비롯한 일본의 롯데 관련 투자주식회사들(이른바 L투자회사)이 100%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의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율은 20% 안팎으로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분율이 두 아들보다 높은 28% 수준이다. 두 형제간 한국 롯데그룹의 주요 계열사 지분율도 엇비슷하다. 롯데쇼핑의 경우 신 회장 지분율은 13.46%, 신 전 부회장 지분율은 13.45%로 0.01% 포인트 차이에 불과하다.
■ 복잡하게 얽힌 롯데오너 가계도
롯데 오너일가의 형제간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힌 형제들의 가계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신 총괄회장은 총 3명의 부인을 뒀다. 첫째부인 고 노순화 여사를 비롯해, 둘째부인 일본인 시게미츠 하츠코, 셋째부인 미스롯데 출신의 서미경 씨 등이 그들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1940년 동향(경남) 출신의 고 노순화 여사와 결혼을 하지만 1년만에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사실상 결혼생활은 파국을 맞게된다. 노 여사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1960년 세상을 떴다. 신 이사장(73)은 신 총괄회장과 고 노순화 여사 사이에 태어난 장녀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 총괄회장은 1952년 시게미츠 하츠코(重光初子) 여사와 재혼을 했다. 시게미츠 하츠코 여사의 외삼촌은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전 일본 외무대신이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당시 다리를 다쳤던 그는, 일본이 패망할 당시 미주리 함에서 목발을 짚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후에 'A급 전범'으로 처벌받았으나 곧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정계에 복귀해 영향력을 발휘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신 총괄회장이 재혼이후 사업에서 승승장구 한 것도, 그의 일본이름이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인 것도 잘 나가던 처가댁의 명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게미츠 하츠코 여사 사이에서 장남 신동주(61·일본이름 시게미츠 히로유키)부회장과 차남 신동빈(60·일본이름 시게미츠 아키오) 회장이 태어났다. 이번 쿠데타를 통해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이복누이인 신 이사장과 연합해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신동빈 회장을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신 회장의 셋째 부인 서미경(55)씨와의 사이에는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32)이 태어났다. 서씨는 미스 롯데 1기 출신이다.
■ 일본과 한국 두 형제 양분체제에서 신동빈 회장 단일체제로
신동빈 회장이 지난 1월 그룹회장으로 급부상하기 전까지 일본은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은 신동빈 회장이 맡아 각각 양분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신 총괄회장은 그룹 후계구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계열사 경영을 맡겼다. 두 형제는 일본과 한국롯데를 각각 맡아 경영을 했지만 성과 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한국 롯데는 성격이 외향적인 신동빈 회장 체제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반면 일본 롯데는 신동주 전 부회장 체제에서 대체로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자연히 힘의 균형이 신동빈 회장 쪽으로 쏠렸다. 지난해 말 신 전 부회장이 그룹 내 주요 보직에서 물러나면서, 롯데그룹 전체를 신동빈 회장이 물려받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 것도 이런 실적차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동빈 회장의 입지가 탄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2004년 해태제과 인수 실패, 2005년 진로 인수 실패, 2006년 까르푸 인수 실패 등 중요 M&A를 벌였던 신동빈 당시 부회장은 잇딴 실패로 ‘미다스의 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손’이란 오명까지 받으면서 그룹 내 입지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은 2009년 들어 두산주류BG와 부산의 쌀과자 업체인 기린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신 총괄회장의 '마지막 소원'으로 불리는 롯데월드몰과 롯데월드타워의 재착공을 이뤄내기도 했다.
이러던 차에 신동주 전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27일부터 올해 1월 8일까지 일본 롯데의 주요 직책에서 잇따라 해임되면서 형제간 경영권 승계 싸움에서 신동빈 회장이 완승을 거둔 게 아니냐는 평가가 주를 이뤘고 실제로 신동주 전 부회장은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 없이 일선에서 물러서 있었다.
■ 본격 막오른 형제의 난, 롯데가(家) 장녀의 선택은
그런데 지난 27일 갑자기 신동주 전 부회장이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모시고 일본으로 날아가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포함한 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해임하는, 경영권 회복을 위한 ‘쿠데타’ 시도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 쿠데타는 신동빈 회장측의 기민한 역공으로 1일천하로 그쳤다. 하지만 형제간 경영권 싸움이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관측은 많지 않다. 오히려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 신영자 롯데이사장이다. 신 이사장은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한 이후 롯데백화점 설립부터 관여한 롯데의 ‘1등 공신’이다. 총괄사장을 역임하다 지난 2012년부터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롯데복지재단, 롯데장학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 등을 이끌며 사회공헌 업무에 매달려왔다. 하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과 손잡고 이번 일본 롯데홀딩스의 쿠데타에 동참, 사실상 경영권 다툼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신 이사장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 때문이다.
신 이사장은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계열사로 꼽히는 롯데제과의 지분율 2.52%를 갖고 있다. 신 전 부회장의 지분인 3.95%를 더할 경우 신동빈 회장의 5.34%를 넘는다. 롯데쇼핑의 경우 신 이사장의 지분은 0.74%로 많지 않지만 신동빈 회장(13.46%)과 신 전 부회장(13.45%)의 지분 차가 0.01%에 불과한 만큼 누구 편에 서느냐에 따라 경영권 분쟁 향배가 달라질 수 있다.
신 이사장은 또 롯데칠성음료(2.66%)와 롯데정보통신(3.51%), 롯데푸드(1.09%) 등에 지분을 갖고 있다. 신 이사장이 이끄는 롯데복지장학재단도 롯데제과(8.69%)와 롯데칠성음료(6.28%), 롯데푸드(4.1%) 등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 왕관수여식의 키를 쥐고 있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애매한 태도
중요한 것은 이번 ‘신주쿠발 쿠데타’의 배경에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단순히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의 SOS 지원요청에 자리만 함께 한 것인지, 아니면 신동빈 회장을 겨냥한 경영권 쿠데타에 적극 동참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쿠데타가 ‘1일천하’로 끝난 28일 신 총괄회장은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지만 기자들의 쇄도하는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 궁금증만 증폭시켰다. 그 다음날인 29일 역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신동주 전 부회장 역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었을 뿐 기자들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지난해 말부터 올해초까지 신동주 전 부회장을 주요 보직에서 물러나게 해서 신동빈 회장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어줬던 신 총괄회장이 이번에는 신동빈 회장을 겨냥한 쿠데타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보여 승계권 구상은 한층 복잡해졌다. 신 총괄회장이 마음을 먹기에 따라 누구든 후계구도의 최종승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종업원 3명에 불과한 일본 광윤사(光潤社)를 정점으로 하는 독특한 롯데의 지배구조 탓이 크다.

현재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는 광윤사→일본 롯데홀딩스→호텔롯데→기타 롯데계열사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비상장법인 광윤사는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 27.65%를 갖고 있다. 광윤사 지분을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신 총괄회장이 여전히 광윤사 지분 약 50%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광윤사 지분을 상속받는 사람이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확실하게 물려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여전히 신 총괄회장의 손에 쥐어져 있다. 못이룬 사랑 때문에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괴테의 소설속 주인공 ‘젊은 베르테르’. 제2의 베르테르가 되지 않으려는 롯데가 두 오너형제의 싸움은 당분간 아버지를 향한 러브콜 전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진설>경제전문기자=wateroh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