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남긴 1950년대 영화 평론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명동 일대의 풍경과 전후 한국의 문화생활상을 추적한다. 짧은 생애 속에서 박인환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시와 영화 너머의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종의 탐사 역사 에세이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오동진 영화평론가] 박인환과 그의 백작들의 흔적을 좇아 명동을 쏘다니는 일파들, 곧 필자와 L, SJ, 그리고 SA, P 등은 어쩌면 ‘명동백작(들)’을 닮은 것이 아니라 현과 K, M과 C 그리고 키티란 여성이 중심이 됐던 ‘GREY구락부’ 회원들을 추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자료나 푸티지 없이 명동백작들의 1950년대적 삶을 유추하기란 어차피 많은 상상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다.
명동의 술집 은성주점에 모였던 박인환, 김수영, 천상병, 전혜린, 이봉구 등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들 각자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아마 GREY구락부가 추구했던 니힐리즘, 극단의 회의주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비밀결사(?) GREY 구락부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르고 바로 그런 점을 모티프로 하여 쓴 단편소설이 최인훈의 『GREY구락부 전말기』였다, 고 추정된다. 물론 상상력을 발동시킨 추측이다.

『GREY구락부 전말기』는 1959년 자유문학을 통해 발표됐다. 『광장』으로 한국문단의 전설이 된 최인훈의 데뷔작이었다. 1959년은 박인환이 돌연사한지 3년이 지나 있던 때였다. 최인훈은 1936년생, 박인환은 1926년생이었다. 최인훈 역시 명동을 쏘다니며 박인환 등의 주사(酒邪)를 엿보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표기이다. 50년대 사람들은 영어를 일본식으로 발음하기 일쑤였고 최인훈은 낡은 식민지 시대의 잔흔, 그 빛 뒤의 어둠이 1950년대 내내를 지배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50년대는 전후의 피폐한 삶 그 자체였다. 희망보다는 비관이 지배했고 현실에 참여하기 보다는 도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도덕과 윤리보다는 퇴폐를 추구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망친 분단의 세상을 아예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북 대신 남을 선택한 이유를 찾아 내려 애썼을 것이다.
1920년대 유럽의 다다이즘이 1950년대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재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최인훈이 주인공들의 모임 이름에 GREY, 곧 회색(분자)을 붙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소설은 결국 남과 북, 좌와 우, 정치와 섹스 그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 아니 소속되지 않으려는 회색분자들의 모임이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 구락부는 결국 키티란 여성 때문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회색분자들도 욕망 앞에서는 여지없이 굴복한다.
이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 현이 경찰 취조실에서 심문을 당하는 장면부터이다. 현은 자신들의 모임이 얼마나 하찮은 딜레탕트들의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려 애쓴다. 그래야 살아서 나간다. 현같은 지식인의 자기 부정은 반공주의로 일관했던 당시의 시대적 억압이 얼마나 혹독했는 가를 반증한다. 그 이데올로기의 편향은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의 군부독재 그리고 2025년의 계엄 사태로 이어진다.
GREY구락부의 현이란 인물이든 박인환이든 그들의 시대는 현재와 유리돼 있지 않다. 박인환의 지식인들과 그들이 의도적으로 내비쳤던 얕은 허울은 최인훈의 그레이 구락부에서 묘사됐다. 그 비겁과 옹졸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2025년에 이르러서도 지식인들의 현란한 수사(修辭)들로 연결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늘 동전의 앞 뒷면이다.

은성 주점의 입석은 1936년 지어진 이래 지금도 같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극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을 바라 보고 왼쪽으로 약 20미터쯤의 거리에 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흔히들 그냥 지나치는 ‘멋이라고는 하나 없는’ 입석이다. 당연히,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없다.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銀星酒店址)’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기자이자 소설가로 시인 박인환이 가장 많이 어울렸던 이봉구가 애칭으로 명동백작이라 불렸다고도 적혀 있다.
이 은성 주막에서 박인환이 쓴 전설의 통속 시 <세월이 가면>이 나왔다.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 가수 나애심은 양은으로 만든, 찌그러지고 손때가 묻은 잔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면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박인환이 휘갈려 쓴 종이는 노트도 아니었을 것이고 은성 주점 어딘 가를 굴러 다니는 누런 갱지(更紙) 같은 종이였을 것이다.

마치 화가 이중섭이 스케치북 종이가 없어 담뱃값 안쪽의 은박지에 그린 그림, 은지화(銀紙畵)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 누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지성들은 100년의 역사를 향해 가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계속 전해질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들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취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혀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감성은 명징했다.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며 그 구체성은 영(靈)보다는 육(肉)에 남는다. 마치 낙인이 찍히듯 입술과 눈동자에 남고 비로서 가슴 속으로 스며 든다. 그 눈동자와 입술은 내 가슴에 있다는 표현은 단순하지만 최고의 낭만성을 지닌다. 소시민적이고 자기 비애적이다. 그와 어울렸던 시인 김규동은 박인환을 이렇게 기억한다.
“(박인환이) 술을 즐겨 마신 것도 결코 공연한 짓이 아니었다. 괴로울 때 혹은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술을 마셨다. 우리는 그 시절 아주 건강한 몸들이 아니었으므로 공복에 깡소주 퍼마시는 일이 피차 건강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술이 아니면 지탱이 안된다는 심정으로 술을 마셨다.” (박인환 시집, 범우사 刊 중에서)

1951년 박인환 김규동 등은 부산에서 전후의 동인지 조직으로 잠깐의 활동 후 해체된 <후반기>를 만들었다. 1951년에는 포성이 멎은 상태였다. 한국전쟁은 1953년에 끝난 것이 아니다. 1950년 6월에 시작돼 1951년 7월에 사실상 끝났다. <후반기>는 기성 문단을 배격하는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하자는 취지의 조직이었고 구태의연한 서정주의와 빛 바랜 감상주의를 배격하자는 것이 주된 행동강령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모임의 주축이었던 박인환의 입과 손에서 ‘세월이 가면’이 나온 건 놀라운 역설이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후반기>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박인환은 김수영 못지 않게 시의 역사성, 사회참여적 성격에 예민했던 시인이었다. 박인환과 김수영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영과 달리 박인환은 애초에 쁘띠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탓에 투박한 민중주의 대신 소시민적 비애와 고독을 즐겨 노래했다. 1953년~1956년 사이 어디메쯤 에서 반 북한 정서가 하늘을 찔렀던 때 박인환은 거기에 맞춰(혹은 원고료를 벌기 위해) ‘새로운 결의를 위하여’란 시를 썼다. 기이하게도 이 시는 반공주의로 읽히지 않는다.
“나의 나라 나의 마을 사람들은 / 아무 회한도 거리낌도 없이 그저 / 적의 침략을 쳐부수기 위하여 / 신부와 그의 집을 뒤에 남기고 / 건조한 산악에서 싸웠다 / 그래서 그들의 운명은 노호했다”고 시작하는 이 시는 중간쯤 이런 심정을 토로한다.
“옛날이 아니라 그저 절실한 어제의 이야기 / 침략자는 아직도 살아 있고 / 싸우러 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 무거운 공포의 시대는 우리를 지배한다 / 이 복종과 다름이 없는 지금의 시간 / 의의를 잃은 싸움의 보람 / 나의 분노와 남아 있는 인간의 설움은 / 하늘을 찌른다.”
박인환은 시대를 통탄했다. 그 통음이야 말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대 박인환의 시적 통곡, 그 눈동자와 입술은 우리들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은 누가, 과연 어떤 지식인들이 시대를 한탄하고 있는가. 박인환이 70년의 격차를 두고 묻고 있는 질문이다.

오동진 프로필 ▶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 前 연합뉴스 기자 / 前 YTN 기자 / 前 <필름2.0> <씨네 버스> <엔키노> 영화 전문 기자 및 편집장 / 前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 前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 前 부산 동의대학교 영화과 초빙교수 /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 저서로 '작은 영화가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