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백작들의 영화이야기①]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처럼, 시대를 찾아 명동을 떠 돈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남긴 1950년대 영화 평론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명동 일대의 풍경과 전후 한국의 문화생활상을 추적한다. 짧은 생애 속에서 박인환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시와 영화 너머의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종의 탐사 역사 에세이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오동진 영화평론가] 일행과 강원도 인제를 향해 출발을 했을 때는 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고 날은 유난히 화창했던 때였다. 정치사적인 일력으로는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이 결정이 난지 3주쯤이 지났을 때였다. 모두들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피크닉을 가는 기분 같은 것이 차 안 내내 흘렀다. 서울에서 인제까지는 2시간 안쪽이면 충분하지만 그렇게 놀러 가는 기분은 차를 중간중간 휴게소에 꽤나 멈추게 했다. 그리고 살짝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산채촌이라는 산채정식 집에 들른 것은 운전을 하던 L의, 고집보다는 충고때문이었다. 도착해서는 먹으면 너 무 허겁지겁이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인제군 원통리 입구에 있는 음식점 ‘산채촌’을 들른 이유였다. 여기는 사실, 산채보다 능이백숙이 더 눈에 들어 오는 곳이다. 거기에 자신들이 재배하는 온갖 산채를 내놓는다. 꽤나 유명한지 주말에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하는데 찾는 사람들이 대체로 강원도 외지 사람인 모양이다. 노부부 주인도 강원도 사람이 아니다.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 출신이라고 했다. 강원도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닭 백숙의 곡기가 마음을 채운다.

박인환과 관련된 글을 쓰겠다고 SNS를 통해 비교적 만 천하에 공지를 했을 때(?) 인제를 다녀오라는 댓글은 인디 라이터이자 문필가인 명로진 씨가 권했다. 그제서야 박인환 시인이 인제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거기에 그의 생가가 있겠군, 하고 생각했다.
박인환에 대한 글의 시작은 그렇게 미약한 것이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었다. 차원이 아니다. 그냥 시작 자체가 미약한 것이었다. 마치 어느 일요일의 여행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창대하게 끝을 맺어야 하는 매우 괴랄한 프로젝트라는 깨달음의 물결이 뇌리를 덮쳐 왔다. 무엇보다 1950년대라는 시대의 벽을 넘는 것이 가장 큰 이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박인환이 불꽃처럼 살다 간 27살과 서른 살의 사이, 곧 1953년~1956년의 시대사를 궤뚫어야 한다는 자각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결국 이것은 꽤나 방대한 일이 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박인환의 개인사에 맞추고 그가 거기서 어떤 반응을 했으며, 그래서 어떤 시어들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왜 그렇게 술을 마셨으며, 그런 그와 함께 시대와 문학을 한탄했던 사람들은 누구들이었으며 등등을 추출해 내야 한다. 이건 저널이 담당할 몫이 아니라 학계 일원이 해야 할 일이다. 이건 벌집이야!, 벌집을 건드린 셈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둘까, 라고도 생각했다.
박인환의 흔적을 좇자고 생각했던 건 한국에 새롭게(새롭게라니?) 쿠테타가 일어나고 앙샹 레짐의 반동이 전국의 먹구름으로 뒤덮일 때, 그의 그 유명한 시 <목마와 숙녀>를 새삼 다시 들여다 보게 되면서였다. 박인환은 1955년 전설의 시 <목마와 숙녀>를 썼다. 한국인이라면 몰라서 안되는 시이지만 그가 이루어 만들고 다듬어 낸 시구의 어디메쯤 곳곳에는 전후 지식인의 통음이 들리듯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같이 절절함이 느껴진다.

그 기이한 시대정신, 내가 직접 겪지 못했던 1950년대 명동의 대포집 은성의 막걸리 맛을 떠오르게 한다. 한국은 남북 모두 피폐하고 빈곤하며 비루하기 그지 없을 때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시 <목마와 숙녀>는 역설적으로 사회참여적인 시, 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또 이렇게도 썼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목마는 하늘에 있고 /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 목메어 우는데』
작가 심아진은 언제가 박인환처럼, 어느 술집의 쓰러진 술병 안에서 목이 메인 채 이렇게 물었다.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니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작가 심아진이 궁금했던 것은 어떤 문학적 본능을 가져야 저런 시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자신에게는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은 시절이 왜 오지 않았었느냐를 자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아니겠는가.
박인환의 시는 근 70년 넘게 사람들에게 기이한 판타지의 열패감을 준다. 생각해 보면 그건 꽤나 공정한 일인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열등감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인환처럼 한 줄도, 단 한 줄도 저런 시어를 내뱉지 못한다. ‘열등의 공정주의’는 박인환 시의 매력이다.
박인환의 시가 처했던 시대적 문제를 생각하면서 엉뚱하게도 네기시 키치타로 감독이 2009년에 만들었던 영화 <비용의 처>를 떠올렸다. 네기시 키치타로는 일본의 준 메이저 영화사 닛가츠의 로망 포르노 감독 출신이다.

영화 <비용의 처>는 1946년, 패전의 일본 사회,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내용이다. 다자이 오사무 원작의 소설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패전 직후 일본사회의 우울한 시대상이 잘 그려져 있으며 다자이 오사무의 그 유명한 염세주의가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마츠 다카코(<4월의 끝> <고백> <라스트 레터>)가 나오고 아사노 타다노부, 츠마부키 사토시가 나온다. 아사노 타다노부가 다자이 오사무이다. 제목의 '비용'은 중세말기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와 비용을 의미하며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롤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다. 극히 퇴폐적이고 의도적으로 방탕함을 추구했던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하여, '비용의 처'란 결국 '다자이 오사무의 처, 사치(마츠 다카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오오타니(아사노 타다노부)는 사치가 아닌 딴 여자(히로스에 료코)와 동반자살을 하려 한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1948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기구한 과거들을 지녔지만 그들이 어울렸던, 삼각 사각으로 엇갈렸던, 사랑의 모습은 진실로 아름답다. 반면에 지금은 아름다운 척, 착한 척, 정의로운 척 하면서도 사실은 살아가는 모습들이라는 게 비루하고 비겁하며 그렇게 위선적일 수 없는 때이다.
<비용의 처>는 왜 영화가 종종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가고 고전을 뒤적이는 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1955년 시인 박인환이 느꼈던 6.25전쟁 전후의 비루함과 그 피곤함은 1946년의 다자이 오사무가 겪었던 그 마음과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2025년에 때아닌 군사 쿠테타를 겪었던 지금의 우리와 같은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인제 박인환 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찬란한 태양과, 능이백숙과, 상남면의 마트 풍경과, 무엇보다 이상한 시대적 우울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박인환에 대한 추적의 이 글은 그리고 그 맥락은 그의 59편에 이르는 영화 평론을 중심으로 들어 왔다 나갔다를 반복할 것이다. 박인환은 놀랍게도 영화 평론을 썼다. 그건 뒤늦은 발견 같은 것이며 결국 이 원고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를 쓰게 되는 단초가 됐다.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를 벗어나지 말며 여기서 끝내자,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연히 시작을 창대하게 하지 말고 영화평론에 국한하는 미미한 시작으로 발을 떼자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박인환 영화평론 전집이 2021년에 안양대 국문과의 맹문재 교수에 의해 책으로 묶여져 나와 있다. 박인환의 영화평론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시대의 이슈에 민감한 청년이었는 가를 깨달았다.
또 한번 삼천포로 빠지자면 박인환에 대한 후세의 평가라고 하는 것은, 쿠바에 갔을 때 체 게바라의 동상이 왜 수도인 아바나에 있지 않고 거기서 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산타 클라라에 있는 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동지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나라 쿠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체 게바라가 현실 정치의 화신이 되기 보다는 영웅적 신화의 서사, 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내다 봤을 것이다. 1965년 체 게바라가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을 때 카스트로가 그를 잡지 않은 것은 게바라를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남겨 놔야 ‘자신만의’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완성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인물로.
마찬가지로 전후 한국의 시단, 문학계는 박인환의 사회참여적인 면모보다는 그의 낭만성, 서정성을 앞으로 내세우는 게 전후 반공의 남한 사회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자신들이 생존해 내기에 더 편리할 것이라 내다봤을 확률이 높다. 박인환 시에 대한 기억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에 가둬 놓고 그의 영화평론 글을 은폐시켰다. 그의 다른 시, 영화평론 글들이 다시 한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한 우리는 1950년대의 박인환, 그가 겪었던 통음의 나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의 연재가 박인환 영화평론과 그 시대의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박인환은 1955년 6월 잡지 <신태양> 4권6호에 1954년 외국영화 베스트 텐을 뽑아 기록했다. 영화평론을 같이 했던 허백년, 유두연, 이진섭, 이정선, 박태진, 이청기, 이철혁, 김소동, 오영진, 이봉래 등과 투표로 결정한 모양이다. 이들 모두 박인환과 함께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들이었다. 1954년 한국 평론가들이 뽑은 외화 10위의 목록을 보고 있으면 기시감이 든다. 이들도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새삼, 생경한 마음으로 떠올리게 된다.
1위는 오손 웰즈의 <제3의 사나이>, 2위는 빈센트 미넬리 감독,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3위는 장 콕토의 <오르페>, 4위는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주연의 <햄릿>, 5위는 <밤마다 미녀>, 공동 6위는 <챔피언>과 <심야의 탈주>, 8위는 ,물랭 루즈>, 9위는 <하이눈>, 10위는 <애상의 나그네>이다.

그 유명한 영화, 게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가 주연한 <하이눈>에게 왜 그렇게 박한 점수를 줬을까. 이들 외화를 수입했던 불이(不二)무역이나 국제영화, 동남영화사 등은 어떤 영화사들이었을까. 이들 영화는 대체 어느 극장에서 주로 상영됐던 것일까. 1950년대 전후의 황량했던 서울 도심가에는 어떤 극장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 참혹했던 빈한의 거리의 극장에서 명동의 백작(들)은 무슨 영화에 울고 웃고 했을까.
앞으로 연재 ‘명동 백작(들)의 영화 이야기’가 추적해 나가야 할 사안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빅 슬립>의 주인공 탐정 필립 말로우처럼 중절모를 쓰고 비오는 명동 거리를 헤집고 다녀 볼 참이다. 1950년대의 시인 박인환이 2025년의 우리를 살려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 늘 그런 법이다.

◀ 오동진 프로필 ▶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 前 연합뉴스 기자 / 前 YTN 기자 / 前 <필름2.0> <씨네 버스> <엔키노> 영화 전문 기자 및 편집장 / 前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 前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 前 부산 동의대학교 영화과 초빙교수 /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 저서로 '작은 영화가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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