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삼성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겸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이 직접 나서 “국민여러분께 머리숙여 사죄한다”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의 사과는 사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의 진앙지가 삼성서울병원으로 밝혀진 직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6월18일자 거꾸로 읽는 경제-정부실패보다 더 뼈아픈 삼성의 실패, 참조> 누가, 어떤 형태로 사과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예상을 깨고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나서 사과를 하자 일각에선 삼성이 메르스사태 해결을 위해 정면돌파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삼성이 사태의 심각성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예상을 깬 이재용 부회장의 직접 사과
사실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사과를 한 것은 삼성그룹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삼성그룹 총수가 직접 사과문을 발표한 것도 전례가 드물지만, 이 부회장이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것은 1991년 12월 삼성전자 입사이후 처음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룹 내부에선 적지않은 진통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삼성이 먼저 나서면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룹총수가 나설 경우 향후 유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과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재용 부회장은 예정되어 있던 해외출장도 연기한채 직접 사과문을 손보고 발표도 직접 하겠다고 자청했다는 후문이다. 이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직후 연기했던 미국출장길에 곧바로 올랐다.

삼성이 메르스사태와 관련하여 단순히 대국민 사과에만 그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않다.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나선 만큼, 후속조치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밑그림을 그려놓았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룹 안팎에선 삼성이 메르스치료를 위해 초대형 민간재단을 만들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모델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가 세운 ‘빌&멜린다 게이츠재단’이 될 것이란 추측이다.
빌&멜린다 게이츠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간 재단이다.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에 의해 2000년에 설립된 이 재단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를 목표로 내걸고 운영되고 있다.
시애틀에 본부를 둔 이 재단의 운영에 대한 주요 결정은 빌 게이츠, 멀린다 게이츠, 그리고 워런 버핏 이 세 명의 이사에 의해 내려진다. 재단의 기금은 351억 달러(약 38조9000억원)에 달한다. 재단을 설립한 게이츠 부부는 2007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자선가 50인 중 두 번째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사과를 발표한 날,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이 “게이츠재단 같은 곳에서 말라리아나 에이즈 같은 질환을 정복하기 위해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언급한 점은 삼성이 유사한 형태의 민간재단을 설립할 것임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빌게이츠 재단 같은 삼성식 초대형 민간재단 설립 가능성에 촉각
삼성은 이와 별도로 삼성서울병원에 대한 대대적인 쇄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6월18일자
<거꾸로 읽는 경제>
에서도 언급했지만 삼성서울병원은 삼성의 미래전략사업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11년 당시 삼성이 삼성서울병원에 대해 대대적인 경영감사를 실시하고 윤순봉 전 삼성석유화학 사장을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 사장겸 의료사업 일류화 추진 단장으로 임명한 것은 삼성이 삼성서울병원을 미래전략사업의 교두보로 삼을 것임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윤 사장은 경제연구소에 있으면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혁신을 이론으로 정립한 인물이고 삼성서울병원 사장에 임명된 이후 삼성의 신수종사업인 바이오와 헬스케어사업을 진두지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윤 사장 부임이후 삼성서울병원은 바이오제약과 헬스케어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해왔고, 지난해 11월에는 개원 20주년을 맞아 디지털 헬스케어의 미래를 선도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은 이번 메르스 사태가 어느정도 진정되면 본격적인 후속대책 착수에 나설 전망이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같은 초대형 민간재단을 출범시키겠다는 구상도 단순히 여론무마용이 아니라, 삼성이 책임있는 자세로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질병치료나 예방에 나설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룹 내에서는 태스크포스팀을 발족하여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사례등을 집중해서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전격적인 사과, 공은 이제 정부의 손으로
삼성의 사과로 이제 공은 정부로 넘어갔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답변에 나설 차례이다. 여당내에서도 이미 이런 지적이 오가고 있다. 비박근혜계 중진인 심재철의원은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초기 실패부터 다시 되짚어보면서 대통령의 사과를 포함해 우리사회 모든 부분이 각자 철저히 반성문을 써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도개혁 성향 소장파인 하태경 의원도 SBS라디오에 출연해 “대통령이 메르스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면서 “사과는 당연히 해야한다”고 주문했다. 하 의원은 그러면서 “삼성의 책임이 2, 3정도라고 하면 정부의 책임은 7, 8 이상”이라고 덧붙였다. 여당의원이 대통령의 사과를 직접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정치권 내에서도 이번 메르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후폭풍을 몰고 올지 크게 염려하는 분위기다.

정부의 사과는 단순히 대통령이 직접 나서 말로만 하는 ‘립서비스’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압도적이다. 메르스 사태 확산을 초기에 막지 못한 정부의 대응실패로 인해 지금 한국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때보다 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는 패닉상태에 빠졌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바꿔 놓았다. 한국의 해외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미세하나마 되살아날 조짐을 보였던 소비심리는 바닥을 기고 있다. 오죽하면 중소기업•소상공인 대표들이 여당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세월호보다 더한 충격에 빠져있다”고 긴급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호소할 정도였다.
정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금리를 추가로 내리고,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도 적극 검토중이다. 추경규모는 항간의 예상을 뛰어넘을 대규모가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내년 총선과 맞물려 돌아갈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치권은 여론의 추이를 보아가며 메르스 사태로 악화된 민심을 돌려놓을 묘책을 구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메르스 사태로 경제는 시계(視界) 제로에 돌입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정치논리가 경제를 지배할 단초를 메르스가 제공했고, 그 책임은 정부가 자초했다는 점이다.
<이진설>경제전문기자=wateroh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