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군대에서 ‘줄빠따’를 맞아 본 남자들은 알 것이다.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을. 매를 맞을 거면 차라리 빨리 맞는 것이 나은데 결국 기다리는 고통이 더 연장된 꼴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이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마치고 18일새벽(한국시간) 금리동결을 발표했다. 연준위원들의 투표결과는 9(동결) 대 1(인상). 동결과 인상 중 동결을 점쳤던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 그대로지만, 수십차례 금리인상을 예고했던 재닛 옐런 연준의장은 스스로의 발언을 부정한 셈이 됐고, 세계경제는 또한번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가게 됐다. 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만 키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연준이 회초리 자체를 거둔 것이 아니라서, 언제 또 매를 맞을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옐런은 10월 인상가능성을 열어놨지만 시장은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 예상 깬 9대1의 압도적 동결 결정-안팎 경제불안 요소 반영
18일 새벽 공개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성명에 따르면 연준은 0~0.25%의 기준금리를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투표권이 있는 10명의 위원중 9명이 금리동결을 찬성했고, 제프리 래커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만이 인상을 주장했다.
옐런 연준 의장은 FOMC 회의를 끝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중국 및 기타 신흥국 경제 성장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시장 변동성을 야기했다"며 "금융시장의 위축이 미국의 성장을 제한할 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경제는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으며 이 점이 연준의 목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경제 불확실성 때문에 금리동결을 결정했다는 배경설명이다.
연준이 계속된 금리인상 예고를 다짐했던 스스로의 입장을 번복하면서 금리를 동결키로 한 것은 금리 인상으로 해외 불안이 가중돼 자국 경제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국내외 경제상황을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핵심에는 중국경제의 불확실성이 자리잡고 있다.
연준은 지난 5월부터 연내에 금리 인상에 나서겠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지난 7월부터 중국발 불안과 신흥국 위기가 심해진 상황에서 연준의 금리 인상 악재까지 겹쳐지면 신흥국은 물론 미국 경제까지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돼 왔다. 이런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이 모두 연준에 금리 인상 자제를 호소한 것도 연준의 금리동결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 경제사정도 금리인상을 단행하기에는 충분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옐런 의장은 "기준금리 인상 여부는 경제지표에 달려 있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는데, 이 경제지표 가운데 핵심은 실업률과 물가수준이다. 연준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른바 양적완화 정책을 펼쳐오면서 내세운 현실적인 목표는 실업률 6% 이내, 소비자물가지수(CPI) 2% 수준이었다.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해말 이후 5%대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 8월 기준 미국의 실업률은 5.1%로 연준이 애초 정한 6% 이내 목표치를 충족하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는 올들어 1.2% 수준에 그쳐 옐런이 기준으로 내건 2%에 한참 못미치고 있다. 실업률만 놓고 보면 인상을 뒷받침하는 반면, 소비자물가지수는 인상 연기 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 기준금리 인상시기는-12월설 우세한 가운데 내년 연기설도 급부상
옐런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대다수 위원들이 올해 기준금리 인상을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옐런 의장은 앞으로 진행되는 모든 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할 수 있으며 10월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리 인상을 결정할 경우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10월이면 불과 한달 뒤인데, 한달만에 세계경제가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12월 FOMC 회의때 금리를 인상할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일각에선 연준이 12월에 소폭의 금리인상을 결정하고 금리가 지속적으로 인상될 것이란 강한 경고를 주는 선에서 타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연준 내부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연준 관계자들의 금리 전망을 나타내는 점도표는 연준 내 의견 변화를 반영하는데, 이번에 공개된 점도표에 따르면 전체 17명의 위원 가운데 13명이 올 연말 금리 인상을 예상해 지난 6월 15명보다 감소했다. 금리 중간값 전망치도 올 연말 0.375%, 1.375%, 2.625%로 지난 6월 발표한 0.625%와 1.625%, 2.875%보다 낮아졌다. 장기 금리 전망치도 6월의 3.75%에서 3.5%로 하향 조정됐다. 심지어 이번 회의에서 한 관계자는 올해와 내년에 마이너스(-) 기준금리까지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세계경제 불안이 지속되면 금리인상 시기가 내년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시기를 내년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럴 경우 연준의 신뢰도에 금리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옐런 의장이 늦어도 올해안에는 금리정상화에 나서겠다고 공언해 왔기 때문이다. 이미 이번 동결 결정으로 연준, 특히 옐런 의장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크게 허물어졌다.
■ 신흥시장 시간은 벌었지만-불안한 행보에 대한 근본적 우려 여전
세계 금융시장은 이번 연준의 금리동결 결정으로 얼마간의 시간을 번 셈이 됐다. 그동안 연준의 금리인상 예고 때문에 신흥시장에서는 투자자금리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달 중국이 꺼져가는 성장엔진을 되살리기 위해 전격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를 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연준의 금리인상 예고와 중국발 쇼크까지 겹치면서 자원 수출 신흥국을 중심으로 통화 가치가 급락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통화 가치는 17년 만에 최저로 떨어져 외환위기 가능성마저 불거졌다. 브라질은 최근 저유가 악재에 정치 불안까지 겹치면서 국가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강등됐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연준의 금리 동결로 인해 신흥국은 한시름 놓았지만 위기감 자체가 가신 것은 아니다. 신흥국 위기의 진원지로 꼽히는 중국 경기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당수의 신흥국들은 외부요인과 상관없이 자체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대외변수와 상관없이 파국을 면할 수 없을 것이란 경고가 나오고 있다.
일부 신흥국들은 금리인상이라는 불확실성이 빨리 가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매를 맞을 거면 차라리 빨리 맞는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인도,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신흥국 재무장관들이 이번 달에 금리를 올려줄 것을 연준에 촉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연내 금리 인상이 예고된 상황에서 불확실성에 시장이 계속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일부 신흥국들 사이에선 인상 기대와 달리, 연준이 금리동결을 결정함에 따라 세계 경제는 불확실성이라는 폭탄을 계속 안고가게 됐다는 불평까지 나오고 있다.
■ 한국에 미칠 영향은?-금리동결로 가계부채 더 늘어날까 걱정
연준의 금리동결은 국내시장에는 단기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동안 미국 금리 인상에 대한 우려로 달러가 강세를 보였으나 며칠전부터 달러강세가 한풀 꺾였고, 국내 증시에서 사상 두 번째로 긴 30일간 순매도하던 외국인 투자자들도 지난 이틀간 매수세를 보인 것이 이런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금리인하에 대한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내수 진작과 수출 증대를 위해 한국 기준금리의 추가 인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정책에 대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한은이 연내 혹은 내년 초까지 한, 두 차례 금리를 내릴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HSBC는 10월과 내년 2월에 두 차례 한은이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봤고, 노무라도 10월과 내년 3월에 각각 금리를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17일 국정감사에서 "현재 금리 수준이 명목금리의 하한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연 1.5%인 기준금리를 더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환율의 움직임이다. 원화가 약세를 이어간다면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을 막을 수 없다. 외국인 투자금 유출입을 결정하는 금리와 환율 중 금리가 변화가 없더라도 원화가치가 계속 떨어지면 외국인 투자금의 탈출러시가 이어질 것이 뻔하다.
사상 최대로 불어난 가계부채에 대한 근본적 해결도 시급한 과제다. 당장은 시간을 벌었지만 연준이 계속 금리인상 카드를 만지작 거리는 이상, 금리인상은 시기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8월말 현재 1130조 5000억원에 달한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시작되면 과도하게 불어난 빚이 경제위기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특히 가계부채는 대출금의 76.4%가 단기 변동금리에 연동돼 있어 금리가 오르면 이자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통계에는 잡히지 않아 ‘숨어있는 가계 빚’으로 불리는 개인사업자(자영업자) 대출 229조7000억원(8월말 현재)까지 고려하면, 가계부채에 대한 대책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도 그렇지만, 당장 개인 차원의 빚 줄이기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준이 금리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은 7년째 이어져온 저금리 파티가 끝났음을 경고하는 강력한 신호다. 12월설, 내년설로 시기만 다를 뿐, 세계는 앞으로 상당기간 금리인상 시기에 접어들 것이 확실하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한국경제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빚이 많은 개인과 가계는 얘기가 다르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파국을 면할 수 없고, 파국후에는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설>경제전문기자=wateroh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