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법부 판결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경제보복으로 뒤집으려는 아베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한일 무역분쟁의 시발점은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이다. 사법부가 내린 결정에 일본정부는 발끈했고 한국정부가 해결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한국정부가 미온적인 대처로 나오자 일본은 보복을 준비했고 그 첫 단추로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많이 쓰이는 3개 핵심소재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카드를 꺼냈다.
여기까지가 지난 8개월간의 경과다. 하지만 이번 무역분쟁의 시초는 2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여운택씨 등 일제강제 징용 피해자 4명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의 강제노역에 동원돼 오사카 등지에서 감금생활을 하며 고된 착취에 시달린 피해를 보상하라며 1997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피해자들은 2005년 다시 한국에서 소송을 진행했고 13년만인 지난해 10월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일본에서의 첫 소송부터 따지면 21년이 걸린 셈이다. 일본최고재판소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합의를 했다고 판결했지만 한국대법원은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은 이후 1944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노동을 한 정씨 등 6명이 낸 손해배상금과 강제노동 기간 중 못 받은 임금을 배상하라는 2000년 소송에 대해서도 18년만인 지난해 12월 미쓰비시 측의 책임을 최종 인정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말 그대로 형사상 문제가 아니라 민사상 책임소재를 다룬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자금 2억달러 등 5억달러의 경제협력 자금으로 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일본정부는 주장했고 일본최고재판소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징용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한국대법원은 오랜 심의 끝에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민간의 피해에 대해서는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을 달리 했다.
아베 정부는 한국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기본정신을 위배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한국대법원은 1965년 협정은 양국간 정치적 타결행위일 뿐,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민간의 피해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아베 정부는 사법부의 독자적인 판결을 한국정부가 해결하라는 식으로 압박을 가했고 압박이 통하지 않자 일본 내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출규제라는 보복카드를 꺼낸 것이다.
강제징용에 따른 민간인의 피해배상을 다룬 사법부 판결을 일본은 정치적 판결이라고 규정했고 한국정부에 해결하라는 압박이 통하지 않자 그것을 뒤집기 위해 경제보복이라는 수단을 들고 나온 셈이다.
그 어느 나라보다 자유무역을 신봉해온 일본이 사법부 결정에 대해 무역보복 카드를 꺼낸 것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무리수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패소할 것이란 지적도 일본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는 2일자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보복조치가 아니며 자유무역과 상관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또 “국가와 국가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이라고 말해 사법부 판결을 계기로 한국 전체를 싸잡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규정했다.
아베 정부가 꺼낸 첫 번째 보복카드의 성격도 큰 문제다.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란 군사목적으로 전용할 우려가 없는 우호국에 대해 수출허가 신청을 면제해줬던 것을 앞으로 일일이 심사해서 승인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을 우방국이 아닌, 적성국으로 보겠다는 것이어서 한국으로선 쉽게 물러서기 어렵게 됐다.
무엇보다 사상 유례없는 무역보복을 통해 한국을 길들이겠다는 아베 정부의 시도가 그 어떤 형태로든 효과를 본다면 일본은 양국간 이해충돌이 있을 때마다 무역보복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 자명해 보인다. 어려움이 있어도 이번 싸움에 져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한국정부의 대응능력에 대한 잘잘못은 그 이후에 따질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