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경제] 미친 전세와 ‘렌트푸어’의 눈물

(뉴스투데이=이진설 경제전문기자) ‘미친 전세’로 ‘렌트푸어’(rent poor)가 무더기로 생겨나고 있다. 렌트푸어란 급증하는 전세값의 가격 상승폭을 감당하느라 소득의 대부분을 써버리는 바람에 여유 없이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에는 전세값이 매매가격에 육박해 일어나는 이른바 ‘깡통전세’ 현상까지 가세, 렌트푸어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집값이 좋을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시세보다 조금이라도 낮아지거나 집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살인적으로 오른 전세값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대출을 받은 렌트푸어들은 늘어난 이자부담과 함께 보증금을 떼일까 걱정해야하는 이중,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벌어들이는 모든 돈을 집에 다 쏟아부을 수 밖에 없는 렌트푸어의 증가는 소비에 악영향을 미쳐 결국 경기불황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 고삐 풀린 전세값-전세값이 매매값 웃도는 역전현상까지 속출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8월중 매매·전세 거래가 동시에 있었던 수도권 1291개 주택형 가운데 12%인 155건의 전세가격이 매매가의 90% 이상에 계약됐다. 지역별로 서울 12%, 경기도 13%, 인천 8%가 각각 전세가율이 90%를 웃돌았다. 특히 이들 전세가율 90% 이상 단지 가운데 전세값이 매매가격보다 비싼 주택형도 총 29곳으로 18.7%나 됐다.
실제로 인천시 동구 송림동 송림휴먼시아1단지 전용 59.99㎡는 지난달 전세가격이 1억7000만원에 계약된 반면 매매가격은 최저 1억4924만원에 거래돼 전세가율이 114%에 달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은 전세물량이 씨가 마르면서 웃돈을 주고라도 전세를 구하려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최근 은행 금리가 낮아지면서 전세 물량이 상당수 월세 전환되면서 전세물량은 시중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상태다.
수요는 여전한데, 물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지난달 수도권 아파트 전세가율은 72%를 기록했다. 서울도 70.9%로 1998년 첫 조사 이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서울에서도 성북구는 지난달 전세가율이 80.1%로 사상 처음으로 80%를 돌파했고 강서구(77.8%), 동작구(77.4%) 등도 80%에 육박하고 있다.

전세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렌트푸어가 쏟아지고 깡통전세에 대한 공포 역시 커지고 있다. 경기가 나빠져 매매·전세가격이 10%만 떨어져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속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금리가 오를 때는 하우스푸어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렌트푸어가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새로운 복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향후 금리가 올라간다든지 전반적으로 집값이 떨어지면 집주인뿐만 아니라 세입자도 안전하지 않다”며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친 전세값 때문에 세입자와 집주인 간 전세보증금 반환을 둘러싼 소송이 급증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보증금 관련 소송(1심)은 2011년 5712건이었으나, 2012년 6478건, 2013년 7506건, 2014년 8000건으로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이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최대 수준인 셈이다. 올 들어서는 전세값이 거의 미친 수준으로 뛰고 있어 전세금을 둘러싼 분쟁은 1만건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전세금 반환소송이 급증했는데, 그때는 집값 폭락과 함께 전세값도 크게 떨어져 빚어진 현상이었다.
■ 서민들 많이 찾는 소형평수, 빌라, 다세대 주택 피해 증가 우려
과거에도 전세값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역전사례는 매매가격이 싼 지방에 국한된 얘기였다. 수도권의 경우 집값 수준이 높다보니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수도권은 물론 서울에서도 ‘전세값>매매가격’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저소득층이 주로 전세 계약하는 빌라나 다세대 같은 저렴한 주택 쪽에서 역전현상이 더 많이 나오고 있어 우려스럽다.
전세가율이 거의 80%, 90%까지 높아진 상황에서 그 정도 가격을 감내하고 들어오는 후속 세입자가 없거나, 집값이 조금만 떨어지게 된다고 해도 전세보증금을 다 안전하게 돌려받기 어려운 세입자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월세를 선호하는 집주인과 전세를 선호하는 세입자간의 간격이 갈수록 벌어져 전세물량 품귀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서울의 아파트 시장에서 월세 계약 비중이 36.2%로 40%에 육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서울 강남·서초·송파구 등 아파트 전셋값이 높은 지역에서는 월세거래 비중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부광장에 따르면 전국에서 평균 전셋값이 가장 높은 강남구의 경우 8월중 월세비중이 44%까지 뛰어 서울평균보다 8.1%포인트가 높았다. 서초는 월세비중이 40.1%, 송파는 36.3%로 집계됐다. 월세전환이 이처럼 크게 늘고 있는 것은 저금리 때문이다. 지금 같은 임대인 우위시장(seller's market)에서는 임대인은 싼 은행이자보다 비싼 월세를 선호하고, 이는 전세물량 품귀를 불러와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세입자들이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월세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할 경우 그 비용은 연리로 따져 7.4%에 달한다. 집주인은 1%대 은행이자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지만 세입자 입장에서는 떠안아야할 부담이 전세때보다 2~3배 더 늘어나는 셈이 되어 주머니 사정이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가 제도적으로 제어하거나, 해결할 묘수 같은 것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 미친 전세 틈타 ‘무피투자’ ‘전세깡패’ 같은 시장왜곡 현상 기승
최근의 전세값 상승은 수요와 공급간의 불균형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그 와중에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아파트를 매입하는 ‘무피 투자’와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여러 채 사 모으는 이른바 ‘전세깡패’ 현상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태원(새누리당) 의원은 전세난을 부추기는 전세값 고공행진 배경에 “무주택자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전세가를 최대한 올리려는 조직적 투기세력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무피투자란 ‘피 같은 내 돈을 들이지 않고 매입하는 것’을 말하고, 전세깡패는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여러 채 사 모은뒤 전세값을 대폭 올려받는 것을 말한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무피투자와 정치깡패를 부추기는 부동산카페들까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고 김태원 의원은 지적했다.

깡통전세를 이용해 은행대출금과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채는 사기사건까지 벌어져 피해자들이 길거리로 나앉는 사태도 일어나고 있다. 의정부지검에 따르면 조모씨(48) 등 분양대행업체 임직원 4명과 공인중개사 7명은 가짜 매수인들과 짜고 담보 가치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은행 대출금 230억원과 전세보증금 15억원 등 모두 245억원을 가로챘다가 검찰에 적발됐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작년까지 정부는 각종 부동산규제를 풀고, 은행대출도 완화해 사실상 대출을 받아 집을 살 것을 권유했지만 내년부터 다시 주택담보대출 요건을 강화하겠다고 태도를 바꿔 시장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전세물량 구하기에 지친 상황에서 싼 대출이자와 정부정책을 믿고 올들어 집을 장만한 2030세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민•신한•우리•KEB하나•농협•기업 등 6대 은행의 8월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327조 9801억원으로 7월(321조5709억원)보다 6조4292억원이 증가했는데, 이는 관련통계를 알 수 있는 2010년 이후 8월 증가분으로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가운데 2030세대의 대출증가율이 40%에 육박해 이들 연령층에서 집중적으로 대출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5년간 8월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2013년 4435억원, 2012년 1조6980억원, 2011년 1조795억원에 불과했었다.
■ 깡통전세 걱정된다면 대출보증제도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
집값에 비해 전세값이 너무 높다고 판단되면 국토교통부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운용하는 전세금안심대출보증 제도를 이용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이 제도는 전세 세입자가 한 번의 보증 가입으로 집주인에게서 돌려받을 전세보증금을 보호받으면서(전세금 반환보증)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전세자금을 마련(전세금 대출보증)할 수 있는 상품이다. 세입자가 은행에서 전세금 대출을 받을 때 HUG가 대출금 상환을 책임짐으로써 금리 부담을 낮춰 주는 방식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서민들은 물론 신혼부부 등 전세 수요가 많은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전세금반환보증의 보증료율은 현재 0.150%로, 전세보증금이 1억원인 주택의 세입자가 8000만원을 대출받으면 연간 19만원의 보증료를 내야한다. 신혼부부, 다자녀가구, 저소득층에는 보증료를 할인해 준다.
서울 등 수도권의 경우 전세보증금이 4억 원 이하일 경우 이 상품을 이용할 수 있다. HUG가 보증해 주는 대출액 한도는 3억2000만 원이다. 수도권 외 지역은 전세보증금이 3억 원 이하(보증 대출액 한도 2억4000만 원)면 이용할 수 있다. 다만 1년 이상의 전세를 계약하고, 임대차 계약기간의 절반이 지나기 전에 신청해야 한다. 전세 주택이 압류나 가압류 등의 상태에 있으면 안되는데 현재 전세금안심대출보증 상품을 이용할 수 있는 은행은 우리, 부산, 광주, 국민, 신한, KEB하나, 대구, NH농협은행 등 8곳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장치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전세 물량을 늘리기 위해 전세를 내놓는 집주인에게 인센티브를 주거나 월세로 전환하는 대신 월세전환율을 낮추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 깡통전세 우려가 큰 지역의 경우 지자체가 나서 전세주택의 실질 주택담보비율(전세보증금 대출금), 낙찰가율 등을 고려해 전세가율 관리선을 정하고 이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월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진설>경제전문기자=wateroh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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