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③] 망우리 박인환의 묘역에 갈 때는 카멜과 조니 워커를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남긴 1950년대 영화 평론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명동 일대의 풍경과 전후 한국의 문화생활상을 추적한다. 짧은 생애 속에서 박인환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시와 영화 너머의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종의 탐사 역사 에세이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오동진 영화평론가] 박인환이 오래 살았다면,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영화감독 한형모와 절친의 선후배가 됐을 것이다. 1917년생인 한형모는 박인환이 죽은 해, 전설의 영화 <자유부인>을 찍었다. <자유부인>은 정비석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과 입센의 <인형의 집> 혹은 <헤더 가블러>를 한국식 통속주의로 바꾼 작품이다. 교수의 아내가 젊은 남자를 만나 춤바람이 난다. ‘국산’영화 최초 격으로 키스신이 나왔다. 박인환은 이 영화를 보기 전 사망했다. 불현듯 그가 이 영화를 어떻게 썼을까가 무척 궁금해진다. 옹호했을까, 아니면 비판했을까.

박인환을 사랑하는 후배 SJ는 박인환의 묘역인 망우리 공동묘지(라 하지 않고 요즘엔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이라 부른다.)에서 일행들을 일부러 빙 돌려 둘레 길을 걷게 했다. 박인환의 묘는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망우산 기슭에 있다. 사실은 코앞이고 5분 거리다. 그걸 크게 둘러서 근 1시간 반을 걷게 했다.

또 다른 후배 SA가 기우뚱 걸으며 몇 번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걸어야 해?” 일행인 L도 결국 쥐가 났다. 망우 묘역은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280 고지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르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 노정 중간에 한용운과 이중섭 김영랑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같은 친한파 도예가의 묘도 있다. 조봉암의 묘에 경배를 표할 수 있는 건 망우리 투어의 수확이다. 묘역 초입에서 만난 ‘영원한 기억 봉사단’의 한 사내는 과거에 대한 사랑이 소수만의 사람들 것이 아니라는 반가움을 갖게 했다. 기억 봉사단. 누가 이 ‘고상한’ 이름을 지었을까.

화가 이중섭이 아내와 아들 둘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시인 박인환 덕이었다는 사실도 망우묘역의 둘레 길을 내려 오면서 불현듯 나눈 대화에서 확인한 것이다. 일본 저널리스트 오누키 도모코가 쓴 『이중섭, 그 사람』 238쪽을 보면 이중섭은 1년 만에 일본에서 재회한 아내 마사코를 다시 떠나 오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선박회사에서 근무하는 친구도 있으니 일본행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이때가 1953년이었다. 시인 박인환이 다니던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1952년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던 때이다. 이중섭에 비해 훨씬 유복했던 박인환은 가난한 화가를 그렇게 도와줬을 것이다. 이중섭은 1916년생이다. 박인환보다 딱 10살이 많다. 과거의 인물들은 그렇게 교차한다. 시대의 인물들은 늘 중첩된다. 1953년 휴전을 전후한 한국은 혼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몸과 정신에 허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박인환은 사진작가 한영수와도 죽자사자 하는 형동생이 됐을 것이다. 1933년생인 한영수는 박인환과 7살 차이이고 23살 때인 1956년 서울의 명동 거리를 수려한 모더니즘의 자세로 카메라에 찍어 냈다. 박인환은 그해 30살의 나이로 죽었다.
모더니즘은 단순히 근대적 세련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성 안에서의 주체적 존재 조건들을 말하되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시선을 담아내는 것이다. 박인환 한형모 한영수 모두 전후의 한국 사회가 지닌 복잡한 내면과 자의식을 표출해 내는데 안간힘을 썼던 예술가들이다.

신세계 백화점 해리티지 뮤지엄에서 지난 5월30일 한달 여의 전시를 끝낸 <명동살롱 사진전>은 이상할 만큼 기시감을 자아 내는 것이었다. 한영수와 임응식, 성두경의 작품 수십점이 걸렸다. 박인환 같은 명동 백작들이 걸어 다녔던 길, 그들이 술을 마시고 왁자하게 떠들며 심지어 술 때문에 구토를 하던 골목길의 풍경 등이 눈앞에 전개된다. <명동살롱 전> 한켠에는 유수의 전자기업 삼성이 만들어 낸 AI 영상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세 명의 사진작가들 작품으로 한편의 영화 같은 동영상을 시전하게 한다. 한 마디로 ‘끝내 주는’ 테크놀로지의 진보이며 과거로의 타임 슬립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착시를 준다. 박인환은 저기 어디쯤 있었을까. 1950년대는, 이렇게, 요즘 여기저기서 환생하고 있다. 과거의 현재화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 주는 무엇이다.
1956년 3월 박인환이 죽기 직전에 썼다는 영화 에세이 ‘이태리 영화와 여배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진실을 그리는 영화를 억압하고 있었던 파시스트의 검열에서 해방된 감독들은 사회의 부정과 이태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역할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무방비도시> <구두닦이> <자전거 도둑>같은 훌륭한 것이며 그들의 작품은 신선하고, 그 자연스러운 리얼리즘은 돈을 많이 들인 온실에서 자란 할리우드 작품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에서는 간혹 작품의 내용보다는 그 작품을 만드는 데 얼마만 한 비용이 들었다는 것이 선전상에서는 중요시되고 있다.”
기자 출신 시인의 영화 글인 만큼 미사여구가 없는 투박한 건조체인데다 꽤나 친(親)예술영화 스타일인 양 다소간의 편견이 개입된 글이다. 박인환의 영화평론은 1950년대의 영화보다는 1950년대라는 시대 자체에, 시대의식과 시대의지에 더욱 천착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확신하건 대, 영화 수입사를 냈거나 아니면 제작사를 설립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또 확신하건 대 물려받은 유산, 재산을 다 날렸을 공산이 크다. 그러지 못했으니 실로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인환의 시 <센티멘털 쟈니>는 월터 랭 감독, 모린 오하라 주연의 1946년 영화를 생각하며 썼을 것이다. 브로드웨이 유명 연출가(존 페인)의 아내이자 스타 배우인 여자(모린 오하라)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딸 아이(코니 마셜)를 입양한다. 여자는 죽고 딸은 엄마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돌보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아이의 손길을 거부한다. 남자는 어린 여자를 기숙학교로 보낸다. 그러나 곧 아이의 영혼에 사랑했던 여자가 빙의(?)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다시 찾는다는 얘기이다. 넬리아 가드너 화이트의 단편 『더 리틀 하우스』를 영화로 만든 것이며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중의적으로 근친욕망을 소재로 한 셈이다. 박인환의 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 긴 사연은 / 구름에 걷힌 달 속에 묻히고 /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 주말여행 / 별 말씀을 / 거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 아 센티멘털 쟈니 / 센티멘털 쟈니”
시는 늘 삶의 긴 사연을 그 안에 그득히 담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별 말씀을, 이라며 그 긴 서사의 수다를 사양해야 하는 법이다.
망우리 묘역에 있는 박인환의 무덤은 양지바른 남향으로 가지런 하고 단아하게 조성돼 있다. 무덤 앞에는 꽤 규모가 있는 반석이 자리하고 있어 그의 시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모여 참배하고 시 한 자락 낭송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문득 일본 요코하마 옛 가마쿠라 막부 자리에 있는 사찰 원각사의 공동묘지 속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묘가 생각난다.
오즈의 비석에는 ‘無’가 써 있으며 주변은 그의 팬들이 가져 온 온갖 술병과 술잔으로 가득하다. 오즈의 그곳처럼 박인환의 묘에도 담배 카멜과 조니 워커 잔이 가득해야 맞다. 주변 무덤 중 하나가 이 시인 박인환의 여자 친구가 묻힌 것이라 했다. 그런 풍문은 팩트 체크가 필요한 것이고 무엇보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는데다 더더욱 유족들에 대한 명예훼손일 수도 있어 매우 조심스럽지만 웬지 그런 얘기들 또한 ‘거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이고 ‘별 말씀’인 셈이라 느껴졌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다. 그건 늘 그렇다.

오동진 프로필 ▶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 前 연합뉴스 기자 / 前 YTN 기자 / 前 <필름2.0> <씨네 버스> <엔키노> 영화 전문 기자 및 편집장 / 前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 前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 前 부산 동의대학교 영화과 초빙교수 /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 저서로 '작은 영화가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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