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35)] 응원봉 선결제 깃발… 윤석열 탄핵되다

민병두 입력 : 2025.04.06 05:50 ㅣ 수정 : 2025.04.06 17:52

K-민주주의 두 번째 이야기. 광주의 김밥과 횟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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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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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 47개 대대 2만 317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도청 안에는 시민군 157명이 남아 있었다. 시민군 윤상원 대변인은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며 당부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승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고, 끝까지 도청을 지킨 시민군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장엄하게 산화했다. (김상집 ‘윤상원 평전’ 중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 2024년 12월 4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패배했다. 김용현은 중과부적이라고 했다. 1980년 광주는 시민군이 중과부적 정도가 아니라 한 줌 밖에 안되었다.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들었다. 광주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운 5월의 시민군이 있었기에 2024년 12월 그들의 딸과 아들, 손녀와 손자들은 K-팝을 부르며 마치 축제처럼 ‘윤석열 탄핵’을 외칠 수 있었다. 영국의 BBC는 “그들의 부모세대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며 과거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K-팝 콘서트 장처럼 변한 민주주의가 가능했다고 보도했다.

 

“계엄군이 외부와 통신교통을 차단시켜 생필품과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도 매점 매석 행위나 폭리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사태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 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서 지금도 헌혈받는 피들이 남아 돌고 있다. 부녀자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 고파하는 계엄군들에게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소위 치안부재의 10일.  곳곳에 흩어진 돌멩이 유리 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던 의사, 간호원들, 어느 때보다 가장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둔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시민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폭도는 누구인가?, 1980. 6. 천주교 광주대 교구 사제단).

 

‘해방 광주’의 빛나는 자치 공동체, 나눔과 연대의 그 위대한 10일. 주먹밥을 나누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이 44년을 건너뛰어 2024년 선결제와 응원봉, 그리고 평화의 깃발이 되어 돌아왔다. 12.3 쿠데타 이후, 전국 40여 곳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12월 7일 윤석열 탄핵 소추안 1차 표결이 있었던 주말에는 주최측 추산 100만명이 모였다.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12월 14일에는 시위가 절정에 달했다. 응원봉을 든 시민들은  ‘윤석열 즉각 퇴진’과 ‘내란동조자 국민의힘 해체’로 하나가 되었다.

 

촛불혁명에서 ‘빛의 혁명‘으로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외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이 썼다. 그토록 다양한 시민이, 그토록 많은 시위대가 촛불을 모아 햇불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특기할만한 폭력 사태도 없었다. 평화적 시위라는 국민적 합의하에 진행되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은 전 세계에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는 것인지 보여주었다.”(2017년 5월 10일)고 보도했다. 

 

8년 후인 2024년 여의도 국회 앞에 촛불을 대신해 아이돌 응원봉(light stick)이 등장했다. 아이돌 팬덤이 나타났다. 그 때는 광화문에서 박근혜가 머물던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면, 이번에는 ’응답하라! 국회‘였다.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헌법적 기관인 국회의원이 답을 하도록 요구했다.

 

2024년에는 시위의 주역도 바뀌었다. 문화도 바뀌었다. 2016년에는 촛불이 상징이었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보수 쪽의 열등감 가득한 비아냥이 있자 LED 촛불이 나타났다. 그래도 진짜 촛불이 혁명의 가장 큰 줄기였다. 이번에는 촛불을 대신하여 응원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촛불혁명이 ‘빛의 혁명’이 되었다.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직 탄핵 소추안이 야 6당 공동으로 발의됐다.  국회의원 재적 300명 중 191명이 참여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군경을 사용한 폭동이 내란죄에 해당하고 헌법과 계엄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의결 정족수인 재적 3분 2에서 9명이 부족했다. 12월 4일 새벽 계엄군을 물리친 시민들은 그날 저녁부터 다시 국회 앞으로 모였다. 갑자기 젊은 세대가 모여들었고, 그들이 주역이 되었다. 12월 7일 윤석열 탄핵소추안 첫 표결을 앞두고 시위대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고, 빛의 물결도 늘어있다. 수만 개의 응원봉이 하늘을 수놓았다. 장관이었다.

 

여론은 당시만 해도 압도적으로 탄핵을 찬성했다. 미디어리서치(12월 4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탄핵/자진 사퇴가 약 75%였고,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가 23.1%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움직이지 않았다. 12월 7일 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 의원이 탄핵안 제안 설명하면서 국민의힘 의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국회 앞에 모여 중계를 보던 시민들도 함께 따라했다. 국민의힘에서는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의원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나머지 105명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퇴장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한겨레신문 등 몇몇 언론사가 이날 국회에 돌아오지 않은 105명의 이름을 신문 1면에 사진과 함께 실었다. 역사에 기록했다.

 

국민의힘은 의원총회에서 탄핵 반대 당론을 정했다. 박근혜 때와 다르게 반대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 당시 탄핵에 찬성했던 이들이 후에 겪었던 정치 보복, 그리고 아스팔트 우파와 유튜버의 압박등이 다른 선택을 하게 했다.(제49화 참조) 반대 당론을 정하고서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불참하기로 한 것은 내부 이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12월 4일 새벽에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에 찬성했던 의원들 중에 18명도 배신자로 분류될 것을 두려워 해 불참했다.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끝내 투표 불성립되자, 영하의 집회 현장은 얼어붙었다. 이 분위기를 살려낸 것이 20대 여성들의 K-팝 떼창이었다. 행진이 시작되면서 로제의 ‘아파트’ 등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것이 일순간 시위 문화를 바꾸었다. 힘이 되었다.

 

매일 매일이 K-팝 경연장이 되었다. K-팝 팬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집회 연단에서는 아이돌 응원봉을 소개했다. 나와 음악적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나의 정체성인 응원봉이 두려움을 이기는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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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K-팝 경연장이 된 집회

 

응원봉은 특히 MZ세대 여성들을 집회 현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한 여성 참가자는 군대가 국회로 진입하는 것를 보고 무서웠는데 응원봉을 들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까 해서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같은 응원봉을 들고 온 사람을 보고 안심이 됐다. 군대는 살벌했는데 시위는 살벌하지 않았다. 시위가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했다. K-팝과 응원봉이 시위 참가의 장벽을 없애주었다. 그들이 10대 시절부터 아이돌을 응원하면서부터 하던 그대로 하면 되었다.

 

아이돌 팬클럽에게 응원봉은 최애 소장품 중의 하나다. 대개의 응원봉은 한정판이 많아서 가격(최고 15만원)도 만만치 않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응원봉을 들고나와 나라를 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하의 강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아이돌 덕질을 경험한 이들에게 영하의 날씨에 밤을 지새우는 것은 훈련된 일이었다. 아이돌이 음악방송 녹화를 하는 밤이나 새벽에 밖에서 대기하며 단련되었다. 마치 군대가 전투에 나가면서 담요와 수통을 챙겨 나가듯이 이들은 우비(나중에 키세스) 보온병 핫팩을 챙길줄 알았다.

 

당근마켓에서는 ‘집회 참석에 한해 엔시티 응원봉을 무료로 대여합니다’라는 글도 올라왔다. 응원봉 없이 집회에 가면 쑥쓰러운 중년 시민, 국회의원들도 챙겨서 나갔다. 당근마켓 등에 태극기 집회 참석하는 이들을 구하는  일당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가 나온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제 응원봉은 시위대의 필수품이 되었다. 조도가 높고 정육면체 모양으로 탄핵 두 글자를 붙이기 좋은 응원봉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응원봉은 색깔과 모양이 아이돌 그룹별로 다르다. 원래는 팬들을 가르는 요소였다. 팬덤마다 상징색이 다르다. 1세대 아이돌 응원 도구는 풍선이었는데 이때는 서로 색깔을 선점하는 것으로 싸웠다. 유사 색깔을 사용하는 것을 갖고 시비도 벌였다. 상호 배격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돌이 기획사에서 착취당하는 것을 보면서 응원봉간에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2024년 탄핵 집회에 와서는 서로에 대한 배격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

 

사회자가 응원봉 소개 시간을 가졌다. 별(아스트로), 아이스크림(아이오아이), 돌고래(엔믹스), 정육면체(엔시티), 가운뎃손가락(에픽하이)…밤하늘에 빛나는 LED 조명 응원봉을 일일이 소개하기 힘들어서 나중에는 한꺼번에 호명했다. 어느 팬덤이 더 많이 나왔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헙법의 팬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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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민중가요에서 K-팝으로

 

안치환의 ‘광야에서’, 양희은의 ‘아침 이슬’ 등 민중 가요가 K-팝으로 세대교체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등 민중의례를 대신하여 2016년 이화여대 시위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투쟁가가 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지금은 정말 소녀 시대가 되었다. 소녀가 커서 청년이 된 그들이 집회를 주도했다.

 

에스파의 ‘위플래시’(Whiplash)부터 빅뱅의 ‘삐딱하게’ 등이 반복되면서 중년 세대들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2월 14일 탄핵 소추안 2차 표결을 앞두고는 아예 온라인으로 ‘플레이 리스트’를 신청받았다. G-드래곤의 ’삐딱하게‘, 이적의 ‘그대랑’,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등을 부르며 시위대는 지치지 않았다. 중년들도 따라할 수 있게 주최측이 민중가요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배려를 했다.

 

현재의 집회 시위문화는 1980년대 386세대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생성되었다. 동남아에도 수출될 정도로 염원과 비장미, 연대와 희망이 섞여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단결 투쟁 쟁취 같은 구호 뒷부분을 3창하는 시위문화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보수정당과 단체들도 구호를 외치는 방식을 따라 배웠다.

 

K-팝 팬덤은 새로운 시위 방법을 창조했다. 디지털로 무장한 젊은층 주도의 차세대 민주주의, 기술 민주주의가 만든 새로운 희망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지도 않았고, 개인주의에 머물지도 않았다. 기성세대는 아이돌 팬덤문화를 하류문화로 치부했는데 이것이 기성문화를 전복했다. 1970년대 포크송과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 이후 반세기만에 벌어진 일이다. 베이비부머가 갖고 있던 세대적 문화적 파워가 뒤로 물러나고 2030이 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예고편이었다.

 

응원봉으로 응원을 받았던 스타들도 응원봉 집회를 지지했다. 가수 이채연은 12월 7일 팬들과의 소통 플랫폼에서 “정치 얘기할 위치가 아니라고? 정치 얘기할 수 있는 위치는 어떤 위치인데? 우리 더 나은 세상에서 살자. 그런 세상에서 맘껏 사랑하자”며 함께 했다. 가수 정세운은 팬카페에 12월 8일 “행봉(응원봉) 들고 흔드는 손이 언제 어디서든 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글과 함께 기프티콘과 핫팩을 선물했다. 김규리 배우(45)는 12월 19일 '빛의 혁명'이라는 작품을 공개했다. 마음껏 캡처해서 써도 된다는 글을 해시태그로 남겼다. 공개된 작품은 국회의사당을 향하는 수많은 응원봉 불빛과 촛불을 담고 있다. 

 

20대 여성, 시위의 주역이 되다

 

“12월 7일 국회 앞 탄핵집회에는 100만명(주최측 추산, 연인원)이 운집했는데 이중 29.7%가 20~30대 여성이었다.(경향신문, 서울시·KT 추계 생활인구데이터) 20대 여성이 18.9%로 50대 남성 13.6%, 30대 여성 10.8%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2016년 촛불집회 땐 20대가 19.4%였는데, 남녀 성비는 56.9% : 43.1%로 남성이 많았었다.(도묘연 박사 논문 설문조사)”

 

2014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가 주력이 되었다. 이들은 성소수자 인권, 환경, 동물권 등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갖고 연대해왔다. 페미니스트 퀴어 장애인은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차별받은 집단이다. 집회 현장에 무지개 깃발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2030여성은 손님에서 주인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혁명가인 엠마 골드만은 “내가 출출 수 없다면 그런 혁명에는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혁명은 본질적으로 참여한 각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고, 모두가 춤출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사회적 약자, 그리고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는 외침이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2030 여성이 주체가 됨으로써 혁명은 본질에 가까워졌다.

 

엠마 골드만의 이 말은 혁명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K-팝, 빛의 혁명은 즐거웠다. 혁명의 기본 요소를 충족했다.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세계에 대한 다른 태도를 꿈꾸지 않고, 노래 없이 의식 없이 춤 없이 어떠한 저항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2030 여성들은 노래와 춤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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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아이유가 나섰다, 선결제

 

12월 14일 윤석열 탄핵 소추 2차 표결을 앞두고 여의도에는 긴장감과 희망이 뒤섞였다. 곳곳에 음료 떡 어묵 물을 나눠주는 부스들이 마련됐다.  성대 이대 경희대 등 각 대학 민주동문회가 나섰다. 십시 일반으로 먹을 것을 준비했다. 노사모도 탄핵어묵 무료나눔을 했다. 광주 시민들은 오월 밥차를 여의도에 보냈다. 진보당, 빈민당,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어묵탕, 떡볶이를 나눠주는 푸드트럭을 준비했다. 제주도의 한 농민은 귤과 키위를 수십 상자를 직접 들고 왔다. 영유아와 함께 오는 부모를 위한 ‘키즈버스’도 마련됐다. 500일 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의 500일 기념여행비로 버스를 마련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한 나눔의 장이었다. 

 

연예인들도 나섰다. 아이유는 국회 인근 빵집, 떡집, 국밥집 등 5곳에 빵 200개, 음료 200잔, 국밥 200그릇, 떡 100개를 준비했다. 소속사인 이담엔터테인먼트는 아이크(아이유 응원봉)을 든 유애나(아이유 팬덤)의 언 손이 조금이라도 녹기를 바란다며 핫팩도 나눠주었다. 선결제 문화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의 이름으로 후원하는 나눔문화이다. 한 순간에 선결제가 집회의 문화로 진화한 것도 K-팝 팬들이 시위의 주인공이 되면서이다. "덕후가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빛을 발하고 있는 요즘"이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탄핵 반대 세력은 아이유를 ‘좌이유’라는 멸칭으로 불렀는데,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판결을 통해 누가 진실의 편에 섰는지를 보여주었다. 아이유 팬들은 판결이 끝난 후 성명을 발표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선택으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시민 곁에 섰다. 아이유의 선택은, 민주주의를 향한 선한 용기였고, 시대를 앞서 읽은 문화적 혜안이었다. 아이유는 단지 후원자가 아니다. 그는 일상을 통해 헌법을 지켜낸 행동의 본보기였다"라고 강조했다. 

 

걸그룹 뉴진스, 소녀시대 유리, 가수 이승환, 뮤지컬 배우 정영주, 배우 서하준 등 수많은 연예인이 동참했다. 박찬욱 영화감독은 빵을 선결제했다. 최민식 배우도 선결제를 하면서 “땅바닥에 패대기 쳐진 이런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그 많은 친구들이 휘두르는 응원봉, 탄핵봉을 보면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세븐틴 보이넥스트도어  몬스타엑스 등 아이돌 팬들이 또 다른 팬을 위해 준비한 푸드 트럭도 즐비했다. 한편 중년층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트로트 가수 임영웅은 탄핵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제가 왜요?"라고 되물었다.

 

기술 민주주의는 서로를 실시간으로 연결해주었다. 연예인들만 나선 것이 아니다. "무료 닭강정 드시고 탄핵시위 힘내세요.",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국회의사당 ○○카페에 커피 100잔 선결제했습니다." 보수의 심장이라고 하는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BTS 이름 대면  커피 100잔, 빵 50개를 수령하게 하는 등 열기는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한 이용자가 만든 '2024 촛불집회 선결제/나눔 페이지'엔 정해진 코드를 대면 수령 가능한 카페 정보 등이 실렸다.

 

조국의 작별 인사, 선결제

 

정치인 중에서는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나섰다. 다른 국회의원들은 선거법 상의 기부행위 금지 조항 때문에 선결제를 할 수 없었는데 조국 의원은 대법원 판결로 공민권이 박탈되었다. ‘월간 커피 여의본점’에 음료 333잔을 선결제했다”며 “제 이름을 대시고 받으십시오. 작은 이별 선물입니다”라고 적었다. 그 후 조국 전 대표는 서울구치소에서 윤석열 파면에 동참했다.

 

프랑스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그리다’ 씨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정보병의 딸이다. 그는 집회 참여 시민을 위해 커피 1000잔을 선결제했다. 그리다 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아침이슬로 다시 만난 세계 ; 어느 계엄군 딸의 고백문 그리고 천 잔의 커피’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꿈도 많고, 재주도 많고, 공부까지 잘했던 우리 엄마.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선택할 수 있던 길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능력을 인정해주는 군대 뿐이었다. 어느 날 엄마는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보병이었던 엄마는 거리로 나가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게 지옥처럼 엄마를 짓눌렀다. 광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미안함,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그들 곁에 있지 못했던 죄책감, 진실의 반대편에 서있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아침이슬’을 부르다 목이 메곤 했다. 

 

국회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했으나 시민이 이를 막아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1980년 광주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나흘 동안 잠을 못잤다. 시민들에게 마음을 보태는 게 어머니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의 땅, 프랑스에서 그 기운을 담아 1000잔 커피를 보낸다. 에펠탑 앞에서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를 부르며 마음을 보태겠다”

 

5.18 주먹밥이 본 선결제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었던 그 10일 동안에 대동세상을 경험한 이들은 지금의 선결제를 어떻게 볼까. 오마이뉴스가 광주에 살고있는 그들을 인터뷰했다.( ‘1980년 당시 주먹밥을 돌린 박금옥 오옥순씨...“계엄날 광주 겹쳐 보여, 사태 끝날 때까지 함께 할 것”. 2024년 12월 20일) 

 

오옥순 : "그때 광주에 학생들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를 떠돌았어요. 그러면서 '시민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도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주먹밥을 만들었죠. 쌀을 구하려고 상인들이 500원, 1000원씩 걷었는디 그 당시에는 그것도 겁나 큰 돈이었요."

 

박금옥 : "시민들이 밥도 못 먹고 다니니까 양동시장 상인들이 나선 거예요. 주먹밥 만들라믄 쌀도 있어야 한께 양동시장 온 상인들 나서서 돈을 모으고. 그때는 시위 참여한 사람들한테 어른, 애기로 구분하지 않고 다 주먹밥을 나눠줬어요. 물도 주고. 무조건 해서 막 맥이는 거여. 주먹밥은 밥을 동그랗게 뭉쳐서 소금 뿌린 게 전부였어요. 그때 김이 어서(어디서) 나겄어요. 넣을만한 게 없었지. 그렇게 만든 주먹밥을 구루마(수레) 안에다 싣고 들고 다님서 나눠주고 그랬어요."

 

오옥순 : "우리 때는 주먹밥을 숨어서 만들었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5·18을 폭동이라 비난하고, '만에 하나 주먹밥 만든 게 알려지면 우리도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용케 숨어서 잘 버텨서 만들었죠. 난 (선결제 하는) 요즘 사람들이 그때 우리 마음과 같다고 봐요. 나누는 것도 용기로 하는 일이에요.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고. 요즘은 몇백만 원씩도 먼저 결제해 두고 집회 참여자들 먹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요. 대단허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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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각 개인의 온갖 자유를 표현한 깃발

 

집회에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이색 깃발이 눈에 띄었다. 혁명에는 단일한 색과 깃발이 등장한다. 깃발은 목표를 제시한다. 깃발은 단결의 상징이다. 세력을 과시한다. 그런데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온갖 깃발이 등장했다. 응원봉과 함께 2024 집회의 상징이 되었다.

 

응원봉을 든 오타쿠 시민연대,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연합회, 순댓국에 순대 빼고 먹기 연합, 덜 볶은 들기름 해방 전선, 원고하다 뛰쳐나온 로판작가 모임회, MZ세대에 감동받은 X세대 연합, 전국 얼죽아 협회,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개근 환자 협회, 전국 거북목 협회, 전국 혈당 스파이크 방지 협회, 전국 수족냉증 연합, 전국 디스크 통증 호소 연합, 전국고양이노동조합,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만두노총 새우만두노조, 직장인 점심 메뉴 추천 조합, 전국 과체중 고양이 연합,  나 혼자 나온 시민,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연맹, 개빡친 퀴어,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

 

정당이나 노총 깃발 보다 더 많은 것이 개인의 깃발이었다. 말로는 연대, 연합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혼자인 경우도 많았다. ‘덜 볶은 들기름 해방전선’의 제작자는 부모가 보내준 들기름이 생각나서 이름을 지었는데 “현재 정부와 집권 여당에 대한 보편적인 분노를 나타내려고 일부러 아무 의미를 담지 않으려 했다”(국민일보)고 한다. 

 

인터넷의 오타쿠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이 장난성 깃발 문화 역시 기존의 비장미 넘치는 운동권 깃발과 다르다. MZ세대들은 익숙하지 않은 운동권 문화보다는 자신들이 익숙한 문화를 실어날랐다. 단체 메신저 앱을 통해 연결된  집회에 참여했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구를 자연스럽게 올렸다. 깃발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자신을 표현했다. 혹은 취미와 특기, 직업 등을 내세우며 함께하자는 '연합'과 '동호회'를 붙였다. 깃발이 대유행을 하자 일본 애니메이션 동호회 사람들은 마포에 호텔을 잡아놓고 밤새 제작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인칭 깃발, 1인 깃발의 시대가 열렸다. ‘흥의 민족’은 시위도 투쟁도 흥으로 했다.

 

박노해 시인은 ‘빛의 혁명’에서 ”... 우리는 그 모든 역사이자 미래이다 // 나라가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는 가장 앞서 새벽별로 빛난다/우리는 나를 살라 사랑으로 빛난다 / 우린 지금 빛의 혁명을 써나가고 있다 // 우리는 선의 전위다/ 우리는 빛의 연대다/ 우린 이미 봄의 희망이다“고 썼다.

 

이들의 목소리가 결집하여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라는 연대체를 만들었다. 12월 9일 ‘윤석열퇴진운동본부’와 ‘거부권 거부행동’ 두 단체가 발족 제안을 내놓은 후 이틀 만에 1549개 단체가 참여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최소강령 최대연대 방식으로 매일 촛불, 주말 최대 촛불을 만들고, 퇴진 촛불의 전국 확대로 나아갈 것이다. 한국사회대개혁을 위한 논의도 촛불광장에서 만들어갈 것”이라고 발족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주권자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윤석열은 퇴진하라!”는 발족 선언문(2024년 12월 11일)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힘으로...헌정질서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차별과 혐오가 없는 평등한 세상,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 모든 사람의 인권이 진정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국사회 대개혁을 논의하고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문제는 국민의힘이었다. 12월 7일처럼 국민의힘이 불참하면 안되었다. 부산시 집회 연단에 오른 여고생 연설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막 걸음마를 뗀 사촌 동생들과 남동생이 먼 훗날 역사책에 쓰인 이 순간을 배우며 자신에게 물었을 때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나가 말했다’고 알려주기 위해 나오게 됐다”고 동기를 털어놓았다.

 

하루도 안돼 영상 조회수는 100만회를 훌쩍 뛰어넘었다. “부산 국민의힘 의원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18살 부산의 딸보다 못한 105명 내란의 힘 국회의원들은 부끄러운 줄 알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현 정권을 보고 5개월 전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던 저와 제 친구들은 분노했다. (…) 대통령이 고3보다 삼권분립을 모르면 어떡하냐.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의 배신자가 되는 것이 아닌 국민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 보수의 의미는 이미 문드러진 지 오래다. 국민의힘은 더 이상 보수주의 정당이 아니다. 반란에 가담한 반민족, 친일파 정당일 뿐이다. 

 

(7일 국민의힘이 탄핵소추안 표결에 집단 불참한데 대해서)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투표 독려를 하는 나라가 세상천지 어디 있느냐. 당신들이 어젯밤 포기했던 그 한 표는 우리 국민이 당신들을 믿고 찍어준 한 표 덕분인데 왜 그 한 표의 무거움을 모르고 있느냐. 지금 제가 서 있는 여기 부산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전국에서 쏘아 올린 촛불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힘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일제에 광복을 얻어냈을 때도, 이전 정부들에게서 민주주의를 얻어냈을 때도 나라를 지켜왔던 건 늘 약자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민이 진 적은 없다. 오래 걸린 적은 있어도 절대 지지 않는다.”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투표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인에게 투표를 호소하라고 하는 상황이 국민의힘을 압박했다. 결국 국민의힘이 탄핵 반대 당론을 사실상 유지한 채 본회의장에 입장하여 투표를 하기로 했다. 12월 14일 우원식 국회의장은 2차 탄핵소추안 표결 결과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명패 수는 3백 명입니다."

 

국회의 무기명 투표는 본인 명패를 명패함에 먼저 넣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는다. 대리투표를 막기 위한 것이다. 명패수와 투표수가 일치해야 한다. 이어 투표함이 열렸다. 누군가는 눈을 감았다. 광장에서 어떤 이는 고개를 파묻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찬성과 반대, 숫자를 세는 데 34분이 걸렸다. 국회의장이 일어섰다.

 

"총 투표수 300표 중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써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국민 여러분께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함, 용기와 헌신이 이 결정을 이끌었습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범야권 192석에 더해 국민의힘에서 8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조경태 김재섭 한지아 진종오 의원 등이 공개적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5명의 의원이 가세해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는 이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다. ‘내란의 힘’이 되어 극우적인 목소리를 내는 의원들이 다수가 되는 상황에 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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