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2)

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입력 : 2023.04.11 08:49 ㅣ 수정 : 2023.04.11 08:55

조선은 청·일 패권경쟁기에 근대화를 추진해 중화질서를 탈피하고 일본을 능가했어야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오늘날은 미·중 패권경쟁 시대이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는 동맹 관계이고,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국과 중국은 모두 중요하며, 그래서 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에 대해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란 제목으로 총 9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image

 

[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조선왕조는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34년이 지난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이때 조선의 국왕은 고종이었다. 그는 1864년 1월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후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할 때까지 약 44년간 조선의 최고지도자였다. 

 

고종이 집권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 시대였다. 부국강병을 통해 해외 식민지를 확장하는 패권경쟁의 시대인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은 1861년부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청을 제압해 동북아의 중화질서를 해체하고 패권을 차지했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을 추종하는 위정척사파가 주류를 이루었고, 청의 양무운동을 배우자는 친청(親淸) 온건개혁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는 친일(親日) 급진개혁파가 있었다. 고종과 집권층은 무능하고 부패해 조선은 어느 모델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청과 일본은 정치 안정과 자강을 조선에 요구했지만, 조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점점 쇠락해갔다. 망국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은 청에 의존했고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유지 위해 내정 간섭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대에 청은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았고,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류쿠(琉球) 왕국이 1879년 일본에 합병당했다. 1884년 청·불 전쟁에서 패배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다음 차례는 조선으로 보고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문제는 청의 국력이 조선에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은 조선과 서구열강의 수교를 주도했다, 

 

조선은 청의 권유에 따라 1882년 5월 미국을 시작으로 6월 영국, 독일과 각각 수교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일본 및 미국과 영국 등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이었다. 리홍장은 이렇게 해서 한반도에 세력균형을 이룩해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지키고자 했다. 조선은 수교 협상을 할 때, 청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예를 표했고, 청이 요구한 대로 미국 등 수교국에 ‘조선은 청의 속국’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 

 

1882년 7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청은 조선의 내정불안을 틈탄 외세 개입을 우려해 즉각 파병을 결정하고 2000여 명의 병력과 전함 3척을 출동시켰다. 청은 군사력으로 신속히 정변을 진압했지만, 일본이 조선 문제에 개입하고 있음을 우려했다. 무엇보다 불안한 조선 내정을 걱정하면서 조선에서 추후 다시 정변이 발생한다면 일본과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청은 임오군란 진압부대의 일선 지휘관으로 참여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凯)를 갑신정변 직후 1885년 10월 조선에 상주시킨다.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사실상의 총독 직책을 부여하면서 청과 조선의 관계는 종주국-속국에서 직할통치제제로 전환됐다. 조선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진압을 요청하자 청은 이를 근거로 즉각 병력을 파견했지만,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동시 출병해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한반도 진출 위해 조선에 정치안정과 자강(自强)할 것 요구

 

청과 무력충돌을 원치 않았던 일본 또한 조선 내정의 불안을 우려했다. 조선이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는 일본에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인 상인들은 서구 상품을 유통시키면서 폭리를 취했고 조선의 수공업자들이 몰락하면서 하층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일본 장사꾼의 사기와 폭력도 빈발했고 조선의 유교적 가치에 위반되는 풍기문란 행동도 빈번했지만 불평등조약에 명시된 치외법권은 일본인들을 보호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개항에 대한 조선 백성의 반감은 점차 커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군란 참여자들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군사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소위와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하나부사(花房) 공사는 일본으로부터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 그리고 육군 1개 대대를 인솔해 인천에 도착한 다음, 고종을 알현하고 주모자 처벌과 피해배상 등을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한 후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공사관 경비병력으로 150여 명은 잔류시켰다, 이 병력이 2년 후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동원된다. 갑신정변에서 일본군은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청군의 위세에 눌려 곧 철수했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주모자를 처벌하고 피해를 배상하는 문제로 조선과 1885년 1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다. 일본은 이후 10여년 동안 청과의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청이 조선의 요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군 진압군을 파견하자 일본도 동시에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결국은 청일전쟁으로 비화됐다. 

 

청과 일본, 자국 이익에 부정적인 조선의 내정불안 우려해 자강 요구

 

조선은 백성들의 불만을 사전에 해소할 정치력은 물론이고 민란이나 정변을 수습할 치안력도 부족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청은 조선의 혼란을 틈타 일본이 세력을 확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병력을 파병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했고 동학농민혁명을 평정하려고 했다. 

 

일본 역시 조선의 불안한 정국에 청이 개입해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과 일본은 동일하게 조선에 자강(自强)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자강이란 ‘스스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청과 일본은 1885년 텐진조약 2조에서 ‘조선은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한다’라고 합의했다. 

 

청은 1880년 김홍집에 전해준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라고 자강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은 1885년 7월 ‘일본과 청 양국이 제휴해 청 주도하에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자’라는 변법 8개조를 청에 제의한 바 있다.

 

대원군 정책 이어받아 군사력 강화하고 재정 보충하며 인재 육성했어야 

 

고종이 집권 초기인 1876년경 부국강병이라는 당시 시대 조류를 직시하고 대원군의 정책을 이어받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첫째, 대원군은 국방 관련 직책에 무장들을 임명하고 안보 요충지인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을 3,500여 명으로 증강했다. 그러나 고종은 진무영 병력을 자신의 호위군으로 전환시켜 내부 문제에도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에 경복궁을 점령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둘째, 대원군은 국가 재정을 위해 세수를 증가시켰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유통되던 청전(淸錢) 사용을 금지시켜 하루아침에 300만냥(쌀 4,500만섬 해당)의 재정을 800냥으로 급감시켰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한양 사대문 통행세, 연강세(沿江稅) 등 국가의 수입원을 없앴다. 그 결과 조선은 재정 부족으로 구식 군인 봉급을 1년 이상 지체시켜 임오군란을 초래했다. 

 

서구 각국으로부터 차관도 들여왔으나 나중에 신용불량으로 차관 도입이 어려워지자 화폐를 발행하는 주조권을 외국 공사관에 대여했다. 게다가 고종은 관직을 팔기 시작했는데, 당시 관찰사(도지사)는 약 5만 달러, 말단 지방관은 약 500달러였다고 일본 공사관은 파악했다. 고종은 수시로 인사이동을 시켜 뇌물도 챙겼으며, 급료를 받지 못하는 관료들은 짧은 재직 기간 동안 본전을 뽑아내기 위해 백성을 수탈했다. 민란이 계속 발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대원군은 인재의 균형 발탁으로 노론 세력의 200년 독재를 저지했고 노론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서원과 만동묘를 철폐했다. 1871년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으며, 환곡·전정·군정 등 삼정을 개선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고종은 민씨 척족을 중용해 이들의 정치적 지지를 대가로 특권을 부여하고 부정과 부패를 묵인했으며 무절제한 생활로 국고를 탕진했다. 

 

이외에도 고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초기 뛰어난 관료들을 서구열강에 2년간 파견했듯이 엘리트를 선발해 선진국으로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모든 권력은 당시 32세였던 고종, 33세였던 민 중전, 32세였던 민영준(민영휘로 개명) 그리고 24세였던 민영익이 장악했다. 그 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1894년까지 10년 동안 고종의 무능과 민 중전, 민씨 척족의 폭정하에 조선은 무너졌다.

  

청·일 패권경쟁 시기의 조선과 유사한 상황이 오늘날 한국에도 존재

 

청·일 패권경쟁 시기의 조선과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르다. 첫째, 당시의 조선은 무능한 전제군주 고종이 44년간 재위하면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끌었지만, 오늘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국민이 정권을 심판하고 선택할 수 있는 시대이다. 이제는 국정을 전횡하고 백성을 수탈하는 민씨 척족 같은 특권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국제화된 인재도 넘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청·일 패권경쟁 시기의 조선과 같거나 유사한 상황이 존재한다. 첫째, 고종이 대원군의 긍정적인 정책조차 부인했듯이 오늘날에도 전(前) 정권 정책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정책을 폐기하는 자해극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 국내정치는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둘째, 우리 군사력이 세계 6위로 평가받고 있으나 핵을 보유한 북한을 압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군사력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공감이 필요하다. 셋째, 국가 및 가계 부채가 계속 증가하고 국가 재정이 부실해지고 있다.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는 고종을 떠올리면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3편에 계속)

 

 


 

image

 

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북한학 박사),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BEST 뉴스

댓글(0)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0 /250
 

주요기업 채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