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3)

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입력 : 2023.04.17 16:55 ㅣ 수정 : 2023.04.17 16:55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세력 균형 이루고 있었으나 조선은 선택할 기회 활용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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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미·중 패권경쟁 시대이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는 동맹 관계이고,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국과 중국은 모두 중요하며, 그래서 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에 대해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란 제목으로 총 9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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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종식시켰지만 러시아가 남하하면서 한반도는 다시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장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누구도 우세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정세는 조선에게 자주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외교 공간을 제공했다. 고종과 대한제국(조선)에 위기였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패배하는 러시아로 기울어진 것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영국의 봉쇄정책이 충돌하는 큰 틀의 국제질서의 움직임에서 ‘조선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과 노력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본이 영국과 미국 등 해양세력을 대리해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는 현실을 꿰뚫어 보았어야 했다. 즉 지정학적 이해를 함께하는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 같은 편’이었다. 국가 안보가 위태로운 이 시기에 고종이 취한 조치는 민중 내부에서 분출되는 개혁의 목소리를 자신의 왕권을 제한하려는 불순한 기도로 판단해 왕권 강화와 함께 러시아를 포함한 외국 공관으로 도주할 궁리에 몰두한 것이었다. 

 

일·러, 첨예하게 대립하며 상호 견제…조선, 협상의 처분만 바라는 국외자

 

청·일 전쟁 이후 1896년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은 급격히 확대됐고 일본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조선 내에서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고종마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친러 내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익 조정의 과정을 거쳤다. 일본은 한반도의 이권을 양보할 수 없었고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를 위해 한반도 진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했다. 일본은 고종의 ‘아관파천’이란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조선에서 자국의 전신선 보호와 개항장의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 주둔을 보장받았다. 이에 러시아도 조선에 일본군과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주병권(駐兵權)’을 확보했다. 

 

일본과 러시아 양국은 보름 후에 다시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했다. 양국이 상호 이익을 조율해야 할 내용이 많다는 의미이다. 일본이 이 의정서 체결과정에서 ‘한반도 39도선 분할’을 제의했으나 러시아는 거부했다. 일본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던 러시아가 한반도 남해 통항이 제한될 수 있는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어 1898년에 체결된 ‘로젠-니시’ 의정서는 제1조에 ‘양국이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명기함으로 상호 견제를 분명히 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에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제시했다. 만주는 러시아 세력권에 두고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한다는 타협책이었으나 러시아는 거부했다. 러시아는 항구 조건이 한반도 남부보다 좋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한반도 진출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러·일 패권기에 일본과 러시아는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조선은 선택의 폭이 넓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양국 협상의 처분만 바라는 국외자였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2500년 전 저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멜로스 대화’ 편에서 “강대국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소국은 당할 것을 당할 뿐이다”라고 설파한 대로 조선은 자강(自强)을 이룩하지 못해 당하고 있었다. 

 

영세중립화론은 외면당했고, 고종은 외국공관 피신과 왕권 강화에 관심

 

당시 조선은 영세중립화론을 제기했으나 열강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영국은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해 한반도 중립화를 지지할 수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어 대한제국 중립화에 관심이 없었다. 영일 동맹 체결 협상을 하던 일본 공사는 “조선인은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어, 열국에 의한 중립을 보장받더라도 언제 내란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라고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고종은 국가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개인의 안위에만 급급해 외국공관으로 피신할 생각을 했다. 고종은 청·일 전쟁 기간이던 1894년부터 러·일 전쟁 종전 시까지 약 11년 동안 7회에 걸쳐 외국공관에 피신을 타진했다. 평균 1년 6개월 만에 한 번씩 시도한 셈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발생 시 미국공관과 영국공관에 피신 의사를 전했지만 거부당했으며, 명성황후 살해사건 직후 1896년 2월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해 1897년 2월까지 1년간 머물렀다. 

 

고종의 아관파천을 수용한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파천을 요청받고 거부한 미국조차도 이 기간에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러시아에게는 함경도 경원과 종성 광산 그리고 압록강과 울릉도 벌목권이 넘어갔고,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과 운산금광 채굴권을 가져갔다. 

 

대한제국 시대에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활동, 광무개혁이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1896년 무렵 지식인과 민중이 중심이 돼 개혁을 요구했고, 고종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성리학 통치 이념을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서구의 근대화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했고, 왕권 약화 조치는 거부했다. 결국 1898년 12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해체하고 관련자를 체포해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는 좌절됐다.

 

위로부터의 개혁 요구인 광무개혁은 1896년 시행됐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도입한다는 정책이념에 따라 부분적인 개혁이 진행됐다. 그러나 고종은 왕의 지위를 제한했던 갑오·을미개혁을 뒤집고, 오히려 “국왕(또는 황제)은 무한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하며, 입법·사법·행정·계엄 등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라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광무개혁은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중단됐다.

 

대륙 및 해양세력 갈등, 정치의 극한 대립, 개혁 미비 등은 현재도 유사

 

구한말 시절 국권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보면 당시 대한제국과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르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신을 지킬 의지도 없고 자치능력도 없다’라고 외면했던 대한제국과 달리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선진국이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와 일본처럼 오늘날 미국과 중국이 우리를 배제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조정하는 협상은 없을 것이며, 고종과 같이 외국공관으로 피신하는 지도자도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때와 변하지 않은 같은 점이 있다ᅟᅳᆫ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 한반도를 사이에 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갈등이다. 당시 고종은 일본이 아니고 일본 뒤에 있는 패권국 영국과 미국을 주시했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이들의 동맹국과 우방국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개별국가의 경쟁이 아닌 진영 간 대결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고종이 만민공동회나 독립협회의 건의를 거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기득권을 지켰던 사례와 오늘날 한국 국민이 우리 정치를 4류라고 비난하면서 불신하는 상황이 다르지 않다. 정치권 원로들은 우리나라의 정치가 이대로 가면 위기를 겪는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정치의 극한 대립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817년 ‘경세유표(經世遺表)’ 서문에서 “(조선은) 터럭 한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가 경고한 200년 후에 결국 나라가 망했다. 필요할 때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가해자인 일본을 극복하려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일본 능가해야 가능

 

만해(萬海) 한용운은 조선왕조의 망국 원인에 대해 “어떠한 나라든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 말의 의미는 망국은 내 탓이지, 남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에서 일본으로 패권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일본이 러시아마저 제압하면서 동북아 패자로 등장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고종과 당시 지도층을 탓하라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의 국민 정서는 일본 정부가 일제 식민통치 36년간 우리에게 가한 잔혹한 행동에 대해 사과하거나 배상을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 상황에 대해서도 엄격해져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경고 이후 200여 년 동안 개혁하지 못한 조선 후기의 정치권, 직접적으로는 자강(自强)하지 못해 국권을 잃고 백성을 식민지 치하로 몰아넣었던 고종과 당시 집권층에 대해서도 역사의 심판을 가해야 한다.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에는 우리가 일본에 참패를 당했다면 미래 시대에는 일본을 앞서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과거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고 미래에서 일본을 이긴다면 그것으로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으로부터 사과나 배상 요구에 앞서 미래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민적 역량을 결집할 때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보다 먼저 달에 유인기지를 건설하거나, 일본에 앞서서 감염병 신약을 개발하는 등 이런 결의가 필요할 때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을 여행하는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이 일본보다 더 발전된 선진국이고 국민은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친절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각 개개인이 자신이 하는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해야 가능한 일이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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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북한학 박사),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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