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4)

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입력 : 2023.04.25 08:37 ㅣ 수정 : 2023.04.25 09:18

중·소 분쟁기 북한은 한때 양국의 경쟁적 지원 약속도 받았으나 우호 관계 유지에 어려움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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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미·중 패권경쟁 시대이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는 동맹 관계이고,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국과 중국은 모두 중요하며, 그래서 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에 대해 ‘미·중 패권경쟁 시대 우리의 선택, 역사와 주변국에 답이 있다’란 제목으로 총 9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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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 전후복구 시기에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전후복구가 끝나자 중국과 소련은 북한의 지원 요청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중·소 분쟁이 시작되면서 양국은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북한에 지원을 약속했고, 북한의 기회는 여기까지였다. 

 

그 후 북한은 중국에 편향되면 소련으로부터 보복을 당했고, 소련으로 기울면 중국이 보복을 가했다. 북한은 양국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중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원을 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50년대 냉전 초기 중국과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같은 이념과 정치·경제체제를 공유했고, 미국의 위협에 공동 대처해야 하는 안보 공감대도 있었다. 

 

그러다가 소련에서 후루시초프가 1956년부터 스탈린의 개인 우상화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중국은 이를 마오쩌둥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해 소련공산당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대미 화해 및 서방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하자 중국은 이와는 반대로 미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은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 사회주의 국가들의 단결을 주장하면서 소련과 대립했다. 

 

소련과 중국은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이견을 드러냈다. 중국이 1950년대 추진한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등은 소련이 구상한 사회주의 분업과 맞지 않아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 소련은 자신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는 중국을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중·소 분쟁 초기 동구 공산권 국가 대부분이 소련 측에 가담해 중국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중국은 북한·베트남 등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 요청에 냉담했던 중국과 소련은 분쟁이 시작되자 경쟁적으로 지원 약속

 

북한은 전후복구에 이어서 ‘5개년 인민경제발전계획(1957~1961년)’을 수립하고 중국, 소련 및 동구 공산권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이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이유는 첫째, 공산권 국가들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고, 둘째, ‘당연한 것을 받는다’라는 북한의 태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중국은 북한의 지원 요청에 회신하지 않고 있었고, 소련은 무상원조 대신에 소규모 차관제공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957년 11월경 중·소 이념분쟁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은 북한의 지지를 받기 위해 ‘북한이 만족할 때까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한다’라는 방침을 세웠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의 지원 요청에 대해 침묵했지만 바로 태도를 바꾸어 즉각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답변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요구한 북한 주둔 중국지원군 철군도 수용하고 이듬해인 1958년 철수를 완료했다. 

 

소련도 북한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중국의 도전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순망치한의 관계인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야 했다. 게다가 소련은 1956년 헝가리의 반소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손상이 간 자신들의 공산권 리더십을 만회할 필요도 있었다. 김일성이 1959년 1월 소련을 방문해 후루시초프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소련은 북한이 요구했던 화력발전소와 김책제철소 등 중공업과 정유공장 건설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어서 1959년 9월 소련은 북한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중공업과 정유공장, 원자력 지원은 중국이 제공할 수 없어 소련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북한은 중국 앞에서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지원을 받아내고, 소련에는 소련의 정책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모두 지원을 받아내는 능란한 술수를 보였지만 북한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북한, 양국 사이에 편향되면 보복받아…언제라도 관계회복 가능하게 관리 

 

북한은 1962년부터 중국에 편향됐는데, 스탈린 우상화 비판과 대미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소련에 동조하지 않았고, 소련이 주창하는 경제정책인 사회주의 분업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중국이 추진 중인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와 유사한 천리마 운동과 협동농장 제도를 채택하고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을 추진하면서 중국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소련은 즉각 보복을 시작했다. 각종 공장 건설 지원 약속을 보류했고, 중공업 장비의 현금 구매를 요구했으며, 동구 공산권 국가와 북한의 교역을 통제했다. 중국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도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공백을 메우긴 어려웠다. 북한이 중공업 발전을 위해 추진했던 7개년 인민경제발전계획(1961~1967년)은 소련의 지원이 없으면 목표달성이 불가했다. 결국, 북한이 1965년 소련과 관계 개선을 통해 지원을 받은 후 이 계획은 목표연도보다 3년 늦은 1970년 종료됐다.

 

북한은 중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권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소련과 관계를 지속했다. 1963년 9월 북한을 방문한 중국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小奇)는 소련에 대한 최후통첩을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할 것을 북한에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이나 후루시초프 이름을 언급하는 직접적인 대소 비난은 자제하고 반소입장보다는 오히려 온건한 태도를 유지했다. 

 

비록 소련을 비판했지만, 공산당 차원에서는 개선의 여지는 남겨 놓고 있었다. 소련에서 후루시초프에 이어 브레즈네프가 집권하자 북한은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북한이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자 이번에는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중국은 1965년 이후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중단하거나 축소했고 추가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더욱이 1965년 발생한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중국과 북한은 더욱 소원해졌다. 

 

이때에도 북한은 중국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은 중국의 대소 정책과 소극적인 베트남 지원에 불만은 있었으나 공개적으로는 “북한은 언제나 중국과 함께 할 것이고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어떠한 행동에도 강력히 반대한다”라고 중국을 두둔했다. 그 결과 1970년 무렵 북한이 중국과 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미국과 동맹 강화하면서도 중국 관계 악화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 필요 

 

중·소 분쟁기 10여년 간 북한이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시계추 외교’를 벌이는 과정에서 소위 친중파와 친소파의 대립은 없었으며, 오직 김일성 목소리만 나왔다.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을 통하지 않고는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한 중국공산당이 배경인 연안파와 소련과 가까운 소련파를 제거했다. 이들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한목소리는 북한의 협상력을 높혀주었다.  

 

중·소 분쟁기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는 중국과 소련의 호의 경쟁은 불과 5년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어느 한 편으로 편향돼 다른 편으로부터 보복을 당한 기간이 10여년에 달하고 그 후 중국과 소련이 화해한 1989년까지 20여년 간 북한은 항상 선택의 어려움에 있었다. 북한은 양국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양쪽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때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다면 다른 쪽의 보복과 견제를 감수해야 한다. 

 

만일 한편에 편향되더라도 다른 편과는 적대적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는 보복의 강도를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계를 회복해야 할 시점에 조속한 정상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에 편향된 기간에도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하지 않도록 신중했고 소련으로 기울어진 시기에도 중국과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 결과 북한은 경색됐던 관계를 정상화하는데 긴 기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우리도 현재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양쪽으로부터 호의를 받는 시기는 지나갔다. 어느 정도 중국으로부터의 반발과 상응한 조치를 예상해야 한다. 그렇지만 중국과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한의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 수렴해 국민 전체가 한목소리 내면 강대국도 무시 어려워 

 

우리가 한목소리를 낸다면 독재국가 북한이 내는 한목소리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북한은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며, 이를 수렴해서 한목소리로 만들어 낸다면 어느 강대국도 한국민 전체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가 경험했던 한목소리와 일치된 행동으로 중국을 한발 물러서게 했거나 놀라게 한 최근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첫째,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일치된 대응은 중국의 양보를 받아낸 바 있고, 둘째, 1997년 우리의 IMF 사태 때 금 모으기 운동에 중국인들은 경탄했다. 셋째, 2002 월드컵 때 보여준 붉은악마의 행동은 우리를 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한마음으로 한목소리를 내면서 하나로 뭉쳤던 시기들이었다.

 

최근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만 문제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문제를 두고 정치권이 보이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안보문제에 대해 사전에 공감을 형성하지 못한 여권도 문제이지만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야권도 그들의 언행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세계 주요국에서 자국의 안보문제를 두고 이렇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치권은 우리 외에는 없다. 필자를 포함한 국민은 우리 정치권의 이런 분열된 모습이 불안하기만 하다. 필자가 연재하고 있는 본 칼럼 3편과 4편에서 언급한 구한말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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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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