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36)] 전광훈 손현보 전한길... 헌법을 부정하는 반동 세력

민병두 입력 : 2025.04.07 11:10 ㅣ 수정 : 2025.04.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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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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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전광훈 목사, 손현보 목사, 전한길 한국사 강사. [사진 편집=뉴스투데이]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한국의 보수는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 보수, 기득권 강남 우파, 개신교 근본주의, 그리고 20대 남성으로 구성되어있다. 내란 국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개신교 보수주의였다.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월남한 평양교회 출신들이 주축이다. 그들의 뿌리 깊은 반공주의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치면서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으로까지 이어졌다. 보수주의 의 뿌리이자 인적 자원의 공급원이 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하나님이 선택한 미국’과의 결합은 우리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다(개신교 관련 내용이라서 하나님으로 표기의 뜻으로 알고 있다). 한 손에는 태극기를 다른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이유이다. 한국 개신교는 출발부터 미국의 근본주의 신앙을 수입했다. 유럽의 자유주의 이성주의 신학과 다르게 미국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고, 선과 악(공산주의, 동성애, 민주당, 이슬람)의 최후결전이 임박했다. 성전에 나서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개신교 보수화의 역사적 뿌리에 대해서는 아래 별첨 자료 참조)

 

윤석열은 예수

 

윤석열의 망상 계엄이 선포되자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왔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밤 11시 46분 ‘전광훈 TV’에 나와 계엄포고령 1호를 읽으며 만세를 외쳤다.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자 “그 사람들 다 체포해야 돼. 정리 안하면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김홍철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는 12월 8일 사랑제일교회 저녁 예배에 참석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빛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추어서 대한민국을 빛의 나라로 바꿀 수 있는 위대한 발걸음을 떼셨다"라고 말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는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12월 15일 교회 예배에서 "국가의 수장이 없어졌다. 그럼 우리나라 신용도가 떨어지지 않겠나. 수출 잘 되겠나.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자랑스럽겠나. 그렇게 되면 기업도 어려워지고 실업률은 오르고 환율은 치솟고 물가는 오르고 결국은 파산하는 중소기업들이 수도 없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거기 나가서 노래 부르고 흔들고 있어요? 바보들이잖아"라고 했다.

 

전광훈 손현보 양인은 그 후 탄핵반대집회를 이끄는 보수, 극우의 양대 기둥이 되었다. 전광훈은 그가 이끄는 대국본(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와 자유마을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주로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었다. 노년층과 보수 우파들이 참여했다. 손현보는 2015년 1월 3일 세이브코리아(SAVEKOREA)를 따로 만들고 ‘성전’에 뛰어들었다. 전한길 역사강사를 영입하여 세를 불렸다. 개신교의 많은 목사와 교회들이 손현보를 선택했다. 여의도에서 시작하여 여의도에서 집회를 마무리했다. 전광훈은 광화문파, 손현보는 여의도파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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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지난 2월 20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대통령국민변호인단 탄핵 반대 통합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전광훈은 누구인가?

 

전광훈 목사(1954년, 경상북도 의성)은 1983년 사랑제일교회를 세웠다. 외환위기 때 어려움을 겪은 교회들을 상대로 재테크 교육을 해주었다. 목회 비전과 연계하여 재테크 방법을 알려주었다. 1998년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설립했다. 김홍도 목사를 훈련원 총재로 추대하고 금란교회에서 청교도영성수련회를 열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서 목회자들을 기수별로 배출했다. 전국 네트워킹의 발판을 마련했다. 영성훈련원을 거친 목사 전도사들이 전광훈이 부르면 성도들을 아낌없이 동원해주었다. 

 

2003년 3.1절 구국집회는 보수주의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김대중 노무현에게 정권을 잃은 보수주의는 침몰하고 있었다. 한기총이 30만명을 모았다. 전광훈은 이때 극우의 전사가 되었다. 내친 김에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던 언론법·사학법·국가보안법 등 4대 악법 개정 저지 운동에 나섰다. 결국 2005년 1월 열린우리당이 포기선언을 했다. 보수교단의 압승이었다. 

 

전광훈은 정당을 창당했다. 한국기독당이 스타 목사들의 열렬한 후원을 받으며 출범을 했으나 비례 득표 3%를 넘어서지 못해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전광훈은 이때부터 당명을 바꾸어 가며 6번을 창당했다. 김진홍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에도 참여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발 벗고 나섰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이명박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출세의 길을 달렸다. 뉴라이트 중에서 개신교만이 대중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되었다. 친박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과 어버이연합이 주도권을 쥐었다. 우리공화당의 조원진이 가세했다. 문재인 정부의 탄생으로 이들이 세력을 잃고 사분오열되었을 때 광장을 지켜준 이가 전광훈이었다. 조직력과 동원력으로 집회를 유지했다. 광장과 아스팔트가 그의 교회가 되었다. 거리에서 깃발을 들고 버텨온 것이 전광훈 원톱 체제를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2018년부터 광화문에서 태극기 세력과 결합, 문재인 정권 퇴진 운동을 주도했다. “문재인 간첩” 등의 발언으로 강경 보수파의 지지를 얻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금란교회의 지지를 얻어 2019, 2020년 한기총 회장을 연임하면서 한국교단을 대표했다. 공부한 신학교도 목사안수도 불분명한 그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올라섰다. 기세가 오른 그는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그 앞에서 까불지 못했다. 머리를 조아렸다. 2022년 대선에서는 윤석열을 후보로 만들고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신의한수’, ‘홍철기TV’ 등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유튜버까지 합류했다.

 

전광훈의 정치 비즈니스

 

전광훈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반복적이다.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맹점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교회는 일상 생활을 희생할 정도로 교회에 헌신적이게 한다. 최종적으로는 목회자, 목사의 권위에 순종하게 한다. 전광훈은 목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맞먹는 선지자다. 전광훈은 늘 얘기한다. ”대한민국 공간에서 100년을 보면 결국 한국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올바른 사람임이 입증“될 것이라고 한다. ‘아멘’이라며 화답한 사람 중에 백년 후에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증할 수 가 없다. 

 

전광훈은 집회에 연주팀과 리액션팀을 배치한다. 오디오시스템은 완벽하다. 부흥회처럼 집회 열기를 극대화한다.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고 열광하게 한다. 영어 통역까지 대동한다. 세상은 개개인들의 복잡한 고민에 대해 일일이 답을 줄 수 없다. 종교는 단순하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거기에 해답이 있어 보인다. 노년층들이 이런 집회에서 위안을 받는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기복적이다. 우리의 토속신앙에 미국의 번영주의 신학이 결합되었다. 교회가 성장하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고, 목사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는 성경 말씀은 잊어버렸다. 전광훈은 그래서 대놓고 돈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헌금 시간이 가장 기쁜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가 하는 집회에서는 반강제적으로 자유일보 구독, 알뜰폰 서비스, 선교카드 등을 통해 돈을 모았다. 제3의 연금이라 하여 노후에 월 100만원씩을 돌려주겠다며 다단계로 가입자를 모았다.

 

전광훈은 정작 자신의 고유 비즈니스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바티칸 교황청처럼 세계기독청을 한국에 세우겠다며 헌금을 강요했다. 1년에 1조원의 부가 창출된다고 했다. 50억원의 재산 가치가 있는 장위동 사랑제일교회를 알박기를 하여 재개발 조합에서 500억원을 벌려다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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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보 목사. [사진=유튜브 폼생폼사 캡처]

 

■ 손현보는 누구인가

 

손현보(1962년)는 고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한 정통이다. 담임목사를 맡은 부산 세계로교회는 부산 강서구에 있다. 외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인구가 늘어나고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 등록 성도가 2000~3000명인데 세계로교회는 등록 성도가 1만여명이다.

 

손현보가 전국적 목회자로 부상한 것은 팬데믹 기간이었다. 그는 정부의 대면 예배 금지 방침을 거부했다. 2021년 1월 대면 예배를 강행하자 부산시가 교회 폐쇄 조치를 했다. 손현보는 교회 앞마당에 의자를 깔고 예배를 이어갔다. 고신은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한 이들이 세운 교단이다. 우상숭배 거부가 핵심이다. 고신은 국가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예배 양식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2021년 3월, 고신 총회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해 정부에 현장 예배 제한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했다.

 

손현보는 2024년 10월 27일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를 열었다. 공동대회장은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였지만 기도회를 성사시킨 것은 손현보였다. 서울시청과 여의도 일대에 개신교인 23만명(경찰 추산)이 모였다. 기도회 주제는 동성혼과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였다. 

 

보수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전광훈의 공로를 인정하지만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사이비와 이단 같은 언사가 논란을 제공했다. 목사 자격 박탈 위기에 처하자 새로 교단을 만들어 목사직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였다. 대안을 찾던 중에 손현보가 나타난 것이다. 10월 27일을 기점으로, 부산의 목사가 단숨에 보수 교계의 적자로 떠올랐다. 전광훈과는 다른 의미에서 변방에서 중심으로 부상했다.

 

동성혼 반대는 한국 교회의 중심 비즈니스이다. 개신교회는 늘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찾는다. 이슬람은 세력이 미미해서 전선을 꾸리기 어렵다. 동성혼은 갈수록 지지를 얻고 있었다. 2022년 대통령 선거 TV토론에서는 왜 개인의 성적 취향을 문제 삼느냐는 발언까지 나왔다. 2024년 10월 건강보험공단에서 동성 사실혼 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교회의 위기감은 커졌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혼 반대 설교 목회자가 탄압을 받게 된다면서 종교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공산화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위기는 성도들을 결집시킨다. 사탄의 권세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다.

 

10·27 집회는 세이브코리아의 산파였다. 그 전신은 ‘거룩한방파제’다. 주로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하던 단체였는데 2025년 1월 3일 세이브코리아로 발전했다. 이 집회로  그동안 광장의 원톱이었던 전광훈이 일격을 당했다. 집회 주도권을 놓고 손현보와 전광훈의 사이가 나빠졌다. 윤석열 계엄으로 양자가 뭉칠 듯하다가 다시 헤어졌다. 반공이라는 큰 비즈니스를 만났다. 시장을 평화롭게 나눠가질 수 없었다. 개신교에서 그동안 나라의 공산화를 막자는 기도를 해왔지만 윤석열이 계염의 명분으로 공산세력과 싸우겠다고 선포하면서 시장이 갑자기 커졌다. 반 동성애 비즈니스에서 반공 비즈니스로 뛰어들었다.

 

전광훈, 전세 보증금이라도 빼서 혁명에 나서라

 

전광훈은 늘 광화문을 사수했다. 광화문을 거점으로 하면서 지방을 돌았다. 가끔 한남동으로 출장 집회를 가기도 했지만 광화문 터줏대감을 자처했다. 서울 서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가 열리던 2025년 1월 19일에도 광화문 집회를 유지했다. 뒤늦게 서부지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에서 초유의 난동사건(제 39화 참조)이 벌어졌다.

 

그의 풀뿌리 조직은 전국 3518개 자유마을이다. 대국본 산하 조직이자 전광훈이 만든 자유통일당의 유관조직이다. 국회의원 선거구 254개 지역구, 3518개 읍면동에 모두 대표자를 두고 태극기 집회에 동원을 한다. 자유마을 강령을 보면 ‘마을 리더를 체계적으로 훈련 시킨 후 대한민국을 재건할 사회 및 정치리더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되어있다. 가입자들에게는 지방자치 선거에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고,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에게는 손을 벌리게 하는 지점이다. 

 

전광훈은 집회 때 마다 3000만명을 모으면 끝장이 난다고 강조했다. 한 동네에서 1만명씩, 3600만명을 모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전광훈은 “12·3 비상계엄으로 국가가 살아났다” “윤석열은 광화문 집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외쳤다. 전광훈은 “마지막으로는 국민 저항권을 발동해야 한다. 국민저항권이 헌법 위에 있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가르쳐 주었다”, 

 

그는 늘 국회의원 수와 비슷한 300명 규모의 국민저항권위원회를 만들 것이라고 공언했다. 윤석열이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입법기구를 만들려고 했던 구상과 비슷하다. 4·19 혁명처럼 국민저항권을 밀고 나가서 국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침묵하다가 히틀러 체제를 맞은 것처럼,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공산국가가 된다고 했다. 국민저항권은 순교를 의미했다. 반복해서 집회에 참석한 자유마을 주민들은 세뇌를 당했다. 논리는 단순하다. 탄핵이 인용되면 이재명 세상이 오고, 이재명 체제는 곧 공산주의 사회이다. 지도부가 저항권을 발동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나서야 한다. 순교를 각오하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제39화 서부지원 난동 참조) 

 

지금 우리 마을이 적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자유마을 대표들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된다.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배급제 사회가 되어야 정신을 차린다”며 계엄을 정당화했다. 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하에서는 그토록 그들이 두려워하던 공산화가 안됐는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전광훈과 유투버들의 말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회의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는다. 

 

전광훈은 3000만명 동원을 위해서 핸드폰 비용 5만원씩을 나눠주며 독려했다. 전세방을 빼서라도 지역에서 버스 10대씩 동원하라고 했다. 나라가 북한으로 넘어가면 전셋방이 어디있냐는 그의 말에 참석자들은 아멘으로 답했다. 정작 그가 얼마만큼의 사재를 털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전광훈은 3월 7일 윤석열이 구속 취소로 석방되자 자신의 예언이 맞았다며 기세 등등했다. 전광훈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대선 후보 지지율이 오르자 “20년 전 기도 중에 김문수를 대통령 만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최근 주장했다. 2024년 12월 임시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국무위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계엄을 막지 못한데 대해 사과하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포함해 장관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김문수만 그냥 앉아 있었다. 이 사진으로 김문수의 지지율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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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대통령국민변호인단 출범식에서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 석동현 변호사. [사진=연합뉴스]

 

■ 손현보, 전한길을 영입하다

 

손현보는 2025년 1월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세이브코리아 창립을 알렸다.

 

“대한민국은 1948년 기도로 세워진 자유롭고 자랑스러운 나라다. 14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자유와 독립에 눈을 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기도와 행동으로 나라를 구해왔다...지금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서야 할 때다...​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선 우리는 이제, 조용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던 애국시민들을 일으켜, 삼권분립을 훼손하고, 법치를 유린하는 대한민국의 반역자들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그리하여 1948년 기도로 세워진 대한민국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만들 것이다.”

삼권분립을 훼손하고 법치를 유린한 것은 윤석열이다. 성명은 그 반대이다.  1월 11일 여의도 기도회를 시작으로​ 1월 18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동시 다발 집회를 예고했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집회에서는 대규모 세를 과시했다. 전국 보수 교회가 성도들을 동원했다. 전광훈에 대한 교회의 반감이 작용했다. 손현보의 설교는 정통 교단의 용어를 사용해서 교회 청년들을 동원하는데 부담이 없었다. 주류 교단에서 자란 교인들에게 익숙한 말과 기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회에 참석해서 눈도장을 찍었다.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으로 큰 상처를 입은 광주에 계엄을 옹호하는 집회를 여는 것에 대해 광주 시민의 커다란 공분이 있었다. 광주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나 부산 대구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대개 비슷했다. 같은 교회에서 버스를 타고 집회마다 참석을 했다,

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씨가 가담하면서 세를 불렸다. 전한길은 2024년 세계로교회 청소년 여름캠프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강의의 대부분은 이승만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1월 5일 부산 세계로교회에 참석해 간증과 강연을 했다. 전한길은 “세계로교회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크게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의 기준점이 되어 줬다”며 코로나19 대면 예배 강행, 10.27 동성혼 반대 연합예배, 세이브코리아 출범을 거론했다.

 

전한길은  팬데믹 때 교회를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야욕을 갖고 대면 예배를 금지시킨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최종적으로 교회를 파괴한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은 유엔의 권고사항이다.

 

손현보는 전국을 돌면서 윤석열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이 나라가 무너질 징조가 보인다. 민주당은 선전, 선동, 공작을 일삼고 있다. 이재명이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는 한 달도 못 돼서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 선관위를 보면 이 나라에 망조가 든 것을 알 수 있다. 이 나라의 군대도 과거 제국들이 몰락할 때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계엄에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하거나 태업을 한 군인들을 조선조 말 망국의 군인에 빗대었다. 손현보는 애국시민과 성도들이 마지막 희망이라며  “윤석열을 속히 복귀시켜 정국을 안정시키고 제2의 건국을 해야 한다. 이 아름답고 복된 나라를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개신교, 증오의 언어

 

“기독교는 증오의 언어에 익숙해요. 성경과 찬송에서 적그리스도를 말하고, 마귀들과 싸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극우들에겐 이재명 대표가 무찔러야 할 사탄이자 마귀인 거죠.”(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경향신문 인터뷰 중에서)

 

서명삼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구도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미국의 은사주의 개신교에서 한국의 극우 목사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은사주의 개신교는 트럼프가 신앙은 약해도 하나님께서 그를 내세워 세상을 구할 것이라며 트럼프의 당선에 기여했다. 주술에 빠져있는 윤석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들어세우셨기 때문이다. 

 

세이브코리아 여의도 집회에서 주성민 목사는 “세상은 참이냐 거짓이냐, 자유주의냐 공산주의냐 두 가지다. 그러나 항상 진실이 이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공산주의 떠나가라, 사전선거 폐지하라, 탄핵을 기각하라” 등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배덕만 느헤미아 기독연구원장은 CBS 인터뷰에서 한국 개신교인들 중에 한 10% 정도가 극우 기독교인일 것이라고 추정을 한다. 예전에 비해서 더 강성을 띄고있고 파괴력이 훨씬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중국음모론 부정선거론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공포감과 절박감이 정서적 동력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지금 곧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한국 기독교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아주 극단화되어 있어서 금방 터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 오랫동안 이미 준비되고 훈련됐던 교계의 동원력 조직력도 한몫하고 있다고 보았다. 대형교회일수록, 극우 목회자일수록 탑다운(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이 강하다.

 

• 전광훈과 손현보의 명암, 구로 구청장 선거와 부산교육감 선거

 

2025년 4월 2일 재보궐 선거가 몇몇 곳에서 치러졌다. 서울 구로 구청장 재선거 원인을 제공한 국민의힘이 후보를 내세우지 않았다. 전광훈의 자유통일당 이강산 후보(1989년)가 35%를 득표했다. 자유통일당 강령에는 “전교조가 주도하는 잘못된 역사교육과 동성애・이슬람・차별금지법을 척결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강산 후보는 선거 내내 '불법체류자를 청소하자'라며 반중혐오를 조장하고 '대통령 탄핵저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언론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자유통일당의 35% 득표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이 있어 소개한다.

 

“이 결과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1. 누가 되었든 '민주당'은 절대 안돼하는 인구가 전 국민의 1/3은 된다. 2. 계엄이라는 반헌법적, 폭력적 행위에 동의하는 인구가 1/3이다. 3. 그냥 국민의힘 지지층을 흡수했을 뿐 큰 의미는 없다.

 

뭐가 되었든지 보수정당이 지금처럼 길을 잃고 극우포퓰리즘에 부합한다면,정말로 강력한 수준의 극우정당이 자리잡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현실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일부에서 주장하듯 국민의힘이 없어진다고 해서, 민주당이 보수정당으로 자리잡고 진보정당과 건강한 경쟁을 하는 체제는 그저 환상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탄핵 이후 정계개편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보수계열 정당이 어떻게 다시 헌정질서 안으로 들어오느냐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헌정질서를 무시하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집권가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어서는 안된다”(조현준씨 페이스 북 글에서)

 

부산시 교육감 선거도 치러졌다. 진보 단일후보 김석준 전 교육감이 51.3%를 득표해 당선되었다. 보수는 분열되었는데 정승윤 후보가 40.19%, 최윤홍 후보가 8.66%를 얻었다. 정승윤의 출정식에는 손현보와 전한길이 참석했다. 전한길은 “4월 2일이면 우리 윤석열 대통령께서 탄핵 각하나 기각이 되어 직무 복귀해서 국가 시스템이 정상화될 무렵이다. 그때 윤 대통령 지지율이 되게 중요하다. 윤 대통령 지지율도 올려드리고 자유민주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4월 2일 재·보궐선거에서 보수 우파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출정식에 앞서 오후 3시께 정승윤 후보 선거사무소에선 손현보 등 8명의 목사가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를 올렸다. 한국공무원불자연합회 회장을 맡은 정승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안수기도를 했다.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도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진보 김석준 후보가 부산의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 2018년 싱가폴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정상회담을 할 때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이기고 , 부산 지역 16개 구청장 군수 증에  13곳에서 승리했다. 이번에는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

 

전광훈은 기고만장해질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손현보는 태세전환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 헌법 재판소 판결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판결이 있고 난 다음 날, 4월 5일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전광훈은 집회를 열었다. 전광훈은 “헌재 결정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헌재의 권위보다 국민저항권의 권위가 그 위에 있다”고 했다. 전광훈은 이미 자신이 윤석열 탄핵과 구속을 다 예측했다고 한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재직할 때 하나님이 계시했다고 한다. "대통령 만들어라, 그러나 마지막은 감옥 갈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광훈은 “나를 일반 목사로 보면 안 된다. 나는 기도를 빡세게 하는 사람이다”며 윤석열이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회를 본 목사는 헌금 시간에 잠시 비가 멈춘 것도 돈이 젖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이날 집회 참가자 수는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 그는 “전광훈 목사님 힘내시라고, 우리는 믿음으로 이겼다고 감사 헌금을 오늘만큼은 더 드려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손현보와 전한길은 탄핵 재판 결과에 승복했다. 모든 집회 일정을 취소했다. 전광훈은 내란 선동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손현보는 전광훈에 비해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월 15일 광주 집회에서는 고 김대중 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했다. 장소를 고려한 발언이었다. 손현보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윤석열이란 사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광훈에 비해 탄핵 반대 운동을 더 넓게, 더 길게  바라보았다.

 

탄핵 반대 집회에서 청년들이 등장했다. 특히 손현보의 세이브코리아 집회에서 두드러졌다. 개신교는 전교조가 아이들을 반기독교로 이끈다고 믿는다.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대안학교도 만든다. 대형교회에서는 유학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기숙형 대안학교도 설립했다. 

 

손현보는 북한 아이들은 유치원때부터 위대한 김일성 동지라고 부르며 교육을 시키는데 우리도 어릴 때 부터 바른 성경, 기도, 역사, 가치관을 가르쳐서 이 세상을 바꿔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손현보는 ‘희망의 대한민국을 위한 한국교회 연합 기도회’(2025년 2월 18일)에서 “교육법을 바꿔 기독교 대안학교에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진화론을 가르치는 공교육에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기독교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전광훈이 노년층을 상대로 집회를 열었다면, 손현보는 청년을 보고 집회를 열었다. 개신교 극우의 원톱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전광훈 손현보의 과잉대표, 개신교의 자성운동

 

전광훈 손현보로 개신교가 등치화되는 것을 방치한데 대한 개신교 내의 자성과 회계가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시국회의가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소속 단체도 손현보의 징계를 촉구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도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김형국 하창완 임진산 목사 등이 '극우화를 경계하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부산 맑은물교회 하창완 목사는 ‘극우화를 경계하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동참을 호소했다.

 

김요한 목사(새물결플러스&아카데미 대표)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오자 “경찰은 전광훈을 빠르게 잡아들여 엄중한 죗값을 물으라. 확신하건대, 전광훈 하나만 사회와 격리해도 극우 파시스트들이 헌재의 결정에 반해 불법 소요와 폭동을 도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정 목사의 극우적 발언이 교계를 너무 혼탁시켰다. 그들의 선동으로 교계와 교인들이 극우 파시즘으로 모두 다 경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극우와 결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높아져야 한다.


 

* 아래는 2024년 9월 한국 개신교의 보수회에 대해서 뉴스투데이에 6회에 걸쳐 연재한 글이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

 

① 미군정과 개신교의 운명적 만남, 개신교 보수파에서는 미국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해

 

개신교는 한국 보수주의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는 ‘정당(국민의 힘) - 뉴라이트 -  개신교’ 3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1989년 보수교단을 총망라해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설립되고 2003년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 이승만 시절 부터 보수 정권을 지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속이원론(聖俗=元論)을 표방하던데서 벗어나 현실정치에 대한 개입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사파가 전향한 뉴라이트가 출범했다. 둘은 상호연대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미국에서 개신교 우파(christian right)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조직화를 한 것이 1979년.  ‘도덕적 다수’가  결성되어  행동하던 흐름이 수입되었다. 개신교우파는 지금 뉴라이트 청년을 양산하는 사관학교 기능까지 맡고 있다. 

 

우리의 질문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해방 직후 남한 인구의 2,3% 안팎이었던 개신교가 어떻게 최대종교가 되었냐 하는 점이다. 개신교는 통계청 조사로 2015년에 인구대비 19.74%, 967만명의 성도를 확보해 최대종교로 부상했다. 둘째는 개신교가 어떤 연유로 친미 반공 반북이라는 3대가치와  친일 반중 친이스라엘이라는 보조가치로 단일화되었냐 하는 의문이다. 

 

개신교보수주의 뿌리는 미 군정과 이승만정부, 한국전쟁과 월남 기독교인이다. 미 군정의 반공기독교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에 영어가 가능한 유학파 기독교인들이 응집했다.가장 강한 교세를 갖고 있었던 평양의 기독교인들의 대거 월남은 기독교국가 건설의 지원군이 되었다. 이승만은 기독교국가로 가기위한 로드맵을 실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개신교와  반공주의가 하나로 결합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규모 반공집회를 통해서 교세를 성장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때 교세가 정점을 찍었지만 태극기집회(정치행동) 예수천국(불신지옥), 번영종교(기복신앙)과 함께 개신교의 3대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영향력이 하락하고 있다. (이 글은 개신교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어서 하느님이라는 표기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표기를 선택했다)

 

미군정과 개신교

 

해방직후 미군정청은 공인교(公認教) 정책을 시행했다. 공인교 정책이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에만 각종 혜택을 주는 정책이다. 실질적으로는 교세가 컸던  유교 불교 천도교 대종교 무교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만을 공인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은 일제 때 경축일을 폐지하고 미국의 축제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되었다. 부처님 오신날이 공휴일이 된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75년이다. 심지어 미국의 독립기념일 (7월 4일)도 평화기념일 등과 함께 남한의 5대 축제일이 되었다.

 

미군정청은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했다. 영어와 번역한 한국어의 불일치가 생길 경우에는 영어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어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육용 언어이고 영어는 정부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어가 권력이 되었다. 400명 가까운 영어 통역관은 대개 친일 지주의 자녀로 유학을 다녀온 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한 자들이었다.

 

“미군정 초기의 고문정치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군정 최고 책임자 주변에 포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 중장의 통역 겸 비서실장을 지낸 이묘목, 군정장관 비서장과 민정장관 보좌관을 지낸 이교선은 핵심적인 사람들이고, 윤보선, 전용선 목사, 이매리 양주삼 목사 등이 중앙행정기관에서, 김광현 목사, 정기원 김정기 등은 지방행정기관에서 고문으로 활약했다.” <강인철 박사학위논문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강인철의 논문에 따르면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행정고문 중에서 목사 3명을 포함한 6명(55%)이 개신교 신자다. 1946년 미군정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제헌의회가 만들어지기까지 대의기구 역할을 했던 과도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21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초대 입법의원 190명 중 38명(목사 13명 포함)이 개신교인이었다. 미군정 당시 남한의 인구가 2천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해 45만명 정도, 인구의 2,3%인데 이에 비하면 과다비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적산(일제의 부동산과 재산)을 처분했다. 적산기업 적산가옥 적산종교시설을 불하했다. 이중 신사와 천리교 등 일제의 종교자산 대부분을 개신교에 몰아줬다. 천리교는 일본에서 유입된 종교로 식민지 시절 교세가 커서 재산도 많았다. 1947년 9월19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장 김법린은 군정청재 산관리관에게 “당연히 불교계에 이양되어야 할 일본 불교적산이 하등의 연고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 의해 불법점거 또는 부적당하게 이양되어 있으며 이미 점유중에 있거나 임대차계약 완료된 재산까지도 다른 곳으로 이양되어 있다”는 항의공문을 보냈다. 해방직후 불교계가 관리하던 40여개의 일본 천리교 사원 가운데 30여개가 교회와 유관기관에 이양됐다.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김재준 목사의 경동교회, 송창근 목사의 성남교회 등 대형교회들과 주요 신학대들 대부분이 천리교 자산의 특혜 배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 후 일본신사나 일본사원 자리가 예수교 예배당 혹은 교회 학교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이며, 한국교회의 광영이며 사교(邪敎)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라고 개신교측에서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교회주의가 이때에 만들어졌다. 대교회는 ‘하나님의 은사의 징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지, 대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미군정 고위관리들은 남한을 기독교 국가화 하여 소련에 맞선다는 점령지 건설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원칙은 1947년 10월9일 군정장관 대리 헬맥이 로마 교황청 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환영사를 한데서 잘 드러난다. 

 

일제시대 일본불교가 전담했던 형무소 교화사업도 목사만 참여켰다. 형목(荊牧) 제도는 목사가 공무원 자격을 획득하여 전국 18개 형무소 교무과장직을 맡는 정도로 까지 발전했다. 개신교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형목은 1961년에서야 타종교에도 개방됐다. 형목(교도소 선교) 군목(군대 선교) 경목(유치장 선교)이 중요한 이유는 어려운 환경하에서 사람들이 회심을 하게 되고, 그들의 회심이 사람들에게 주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볼 때는 외진 곳이지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영혼을 구제해주는 것을 물론이고 선교의 블루오션이다.그 블루오션을 특정 종교에 몰아준 것이다.

 

개신교는 1947년 3월부터 매 일요일마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HLKA)을 통해 선교 방송을 내보내게 하면서 개신교를 우대했다. 선교방송은 다른 종교들에게도 허용이 되었다. 다른 종교는  월 2-3회 선교방송의 기회를 가졌지만 개신교는 매주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서울중앙방송은 일제 때 부터 국영방송의 역할을 했다. 일황의 항복선언도 이 방송을 통해 들었다. 국영방송 같은 위상을 갖고 있어서 이 방송에 자자 노출될 수록 특정 종교가 국교 처럼 인식되는 효과를 주게된다. 

 

이규태의 책에 보면 일제 말기에 학교에 다녀오면 형들이 이불 속에 들어가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 일제가 곧 패망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 얘기를 밖에 나가서 했다가 혼쭐이 났다는 회고가 있다. 당시 이승만도 주기적으로 방송을 했는데,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대통령감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하는데 방송이 기여했다. 그만큼 미디어의 영향력은 크다. 가톨릭에는 경향신문사를 불하했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시대에 대표적인 야당지가 되었다.

 

한반도 5천년의 역사에서 문명은 인도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종교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동양에 속해 있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미군의 점령으로 문명과 신앙의 경로가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서양문명 특히 미국문명과 기독교가 하루 아침에 남한 땅을, 공산주의와 소련문화가 북한 땅을 지배했다.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개신교 보수파에서는 미국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② 이승만과 개신교

 

유학가문에서 자란 이승만, 기독교 국가 건설을 일생의 목표로 삼아

이승만(1875~1965)은  유학가문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다. 영어를 배우려고 1895년 배재학당애 입학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접했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했다. 프린스턴대학은 당시에는 복음주의, 기독교 보수주의의 산실이었다. 그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국가 건설 꿈을 점점 구체화 하였다.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및 한인 YMCA를 창설하여 교포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미국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미국의 건국이념과 제도를  따른 ‘형제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선전했다. 1919년부터 한국을 동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고 알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총선거는 원래 5월9일 일요일로 정해졌으나 개신교에서 주일날에 선거를 할 수 없다고 미군정을 설득하여 월요일인 5월10일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27일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됐는데,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000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이란 제목의 선서문을 채택했다. 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는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의원(목사)이 기도했다.”(속기록)

 

임시의장(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 기립) ”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국회가 처음 열린 날에 이승만 의장이 4번, 이윤영 목사가 12번(주님 1번, 예수 그리스도 1번 포함) 국회의원 전원에 의해 1번, 하지 중장에 의해 1번 하나님을 호명해서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승만은 그해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밝혔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맥아더는 참석자들에게 기립할 것을 요구하고 주기도문을 바쳤다.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렸다. (강인철의 논문에서)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허리를 숙여 하는 국기에 대한 배례(경배)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였다. 미 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개신교에서는 “국기를 우상화했던 일본과 나치 독일은 패망했다”며 배례는 국기를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범 개신교의 의견으로 1950년 3월 반대서한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고 그 해 4월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주목하며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는 주목례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1954년 한국 최초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 설립에 특혜를 줘 선교 인프라의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방송은 1960년대 초반 이미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방송망을 갖추며 수십 년간 종교방송 시장을 독점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19개 부처 장을 역임한 153명 중 47.7%, 차관까지 포함한 242명 가운데 38%가, 국회의원 208명 가운데 약 21%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개신교는 1952년 8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실시하는 선거 때 마다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가는 정과 오는 정이 돈독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했으며 1956년 명예장로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군종제도를 실시해 군선교를 하도록 했다.  부상 당하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군종에서 불교만 빠졌다. 기독교와 천주교만의 군종제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군종제도가 실시되고 불과 3년만인 1954년 군장병의 종교 분포가 개신교 20%, 천주교 4%, 불교 6%, 유교 12%, 기타 7%, 무종교 51%로 나타났다. 1951년 부터 1967년까지 군종제도를 기독교가 독점한 결과는 오랜동안 지속되었다. 개신교 군종장교의 비율은 1997년에 66.7%, 2004년에 58.3%, 2018년 국방부 자료로는 총 492명 중애 258명으로 총 52.4%에 달했다.

 

강인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정규 장교로 임명된 목사들로 군종장교단이 구성된 것은 미국의 피선교지 가운데 한국이 처음이었다. 전쟁 기간 중 17만 명에 달하는 공산군 포로 가운데 6만여 명이 한미 양국 목사들의 안수로 개신교 성도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낳았다. 미군정 당시 전체 인구의 2~3% 불과하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1941년 30여만명이던 개신교 신자수가 1950년 약 130만 명으로 늘어나 10년 사이에 4배의 성장을 보였다. 

 

이승만은 한국전쟁과 그 후 계속된 원조 물자 배분 과정에서 기독교계에 특혜를 주었다. 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 연합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기독교세를 급성장 시키는 물적 기반이 됐다. 교회에 가면 빵과 우유를 얻어먹을 수 있었고,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찬송가 소리와 따듯한 죽 한 그릇은 사람들에게 없던 신심도 생기게 했다. 60대 이상 많은 이들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부활절 달걀과 성탄절 선물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직후 피난민이 260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 빈민이 430만 명 등 총 1000만 명이 구호의 대상자였다.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는 재정이나 조직 면에서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다. 조직이 있는 기독교가 원조물자의 배분을 담당했다. 미국은 전체 구호물자의 대부분을 담당했고,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구원자로 비쳐졌다. 

 

미국은 일제에서 우리 민족을 독립시킨 해방자이고, 공산주의 침략에서 우리를 지켜준 수호자이고, 경제를 일으켜 준 구원자라는 인식은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미국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하나님이 임재한 국가이며, 그런 미국과 한미동맹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과 반공주의를 이용해서 권력을 안정시켰다. 북한의 남침 위협은 이승만의 비타협적인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해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었다. 미군이 인계철선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단독정부 수립과 한미동맹을 주도한 이승만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이승만 국부 추대운동의 한 배경이 된다. 한국의 보수개신교가 신앙처럼 강조하는 친미 한미동맹 반북 반공의 가치관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미국과 함께 반공의 최전선에서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자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보수주의와 함께 정치적 보수주의도 이때 태통한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기존 질서가 거부당하자 “역사 속에서 쌓아 온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확인된 가치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근본적 변혁, 외과적 수술(surgical operation)을 꿈꾸는 진보주의와 대립하는 점진적 변화, 표면적 치료(cosmetic healing)의 보수주의가 탄생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킨다는 토대 위헤서 시작을 하지 않고 무엇을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자유 민주 공화 같은 가치는 원래 우리 보수의 것이 아니었고 체득되지 못했다.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공감대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이 반공을 매개로 하여 독재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개신교 보수주의는 이렇게 불안정한 출발점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보수화③ 한경직과 개신교의 DNA

 

개신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를 근거로 폭정에 대해서는 침묵한경직의 반공주의,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중요 자산

 

해방 이전 우리나라에 파송 온 개신교 선교사 1530명 중 66%가 미국이이었다. 1893년에서 1983년 까지 개신교 선교사의 87%가 미국에서 왔다.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고종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간 호머 헐버트,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같은 선교사는 극히 예외적이었으며 대부분은 일제에 순응하도록 가르쳤다. 미국선교사들의 입장은 정치 참여 불가였다.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지배적이었던 복음주의 특히 태통단계인 근본주의를 신앙의 무기로 하여 조선 땅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선교사가 부족하여 성도들끼리 주기적으로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가 집회와 전교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성경을 중시하는 신앙적 분위기에  성경무오설(무오류설)을 믿는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들아왔다. 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 선교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존중했다. 일점일획도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한 종말론(세대주의 전 천년설)에 입각하여 말세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시기가 말세라는 여러가지 신학적 해석 근거를 갖고 있었다. 종말이 임박했음으로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회심을 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령체험으로 부흥을 하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다.  기도하며 휴거와 천년왕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신앙이 조선왕조 5백년의 치정과 유교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던 조선 민중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처럼 들렸다.(배덕만)

 

감리교의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장로교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개신교 역사에서 기록적인 성령체험으로 전해져온다. 원산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이 체험은 평양에서 1500명의 성도들의 고백이라는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예수 사후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오순절사건이라고 할 정도로 개신교 부흥의 단초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희망을 잃은 유대인들이 성령체험으로 기독교 부흥을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체험으로 인식되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도 대부흥에서 비롯되었다. 평양이 개신교의 중심이 되었다.

 

복음주의 개신교의 평가와 달리 다른 쪽에서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한가로이 죄를 고백해서 되겠냐, 개신교의 비정치화 전통을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고, 누구는 해외망명을 하는데 일제의 침략에서 피해가는 듯한 자세라는 지적을 받았다. 개신교는 한기총 설립 이전까지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마태오 복음 22장 15절-22절)을 근거로 삼아 독재정권과 폭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평양의 대부흥에 힘입어 서북교회(평안도 평양 중심) 황해도 교회가 전체 개신교의 70%의 비중을 차지했다. 신학교가 설립되고 미션스쿨이 만들어졌다. 해방 후 서울에는 겨우 30개의 교회가 있었고, 남한 전체에 기독교인은 10만명에 불과했다. 북한 교회가 월남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해방 후 10년간 신설된 2000여개의 교회 중에서 90% 이상이 월남한 개신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들의 힘으로 남한의 개신교는 비약적으로 교세를 확대하게 된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1902-2000)의 월남은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가 된다.

 

한경직 목사는 서북지역 개신교계 거물로 먼저 남하한 윤하영 목사(미 군정청 공보관)과 미 군정의 도움을 받아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윤하영은 신의주 제1교회 담임목사, 한경직은 제2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반공의 상징인 오제도, 장도영 등이 신의주에서부터 한경직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창립 당시 27명이던 신자가 이듬해 말에는 1,500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1949년에는 6000 명에 이르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고도 성장의 배경은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이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45년 말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인이거나 중상류층으로 속했다. 이들은 김일성의 토지개혁으로 땅과 고향을 빼앗기고 인민재판으로 숙청을 당할 위기에 처한 계층이었다. 오고갈데가 없는 그들은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로 몰렸고, 교회는 그들에게 원조물자와 경찰 등 일자리를 알선했다. 

 

그많은 월남 교회 중에서 영락교회로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한경직의 반공주의가 강력하면서도 신앙적으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주 반공 투쟁 등에 앞장섰던 그들은 반공투사를 자처하고 폭력의 선봉에 섰다. 서북청년회를 결성하고 좌익과 민간인 테러에 앞장섰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무서운 게 없었다. 당시에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에 있는 국제선교협의회(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CCIA)에 급전이 당도했다. “북한의 침략했다.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두 줄 짜리 전문은 한국기독교연합회 남궁혁 총무가 발신자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경직 목사의 아이디어였다. 이 전보가 자유세계와 유엔을 움직여 한국파병을 결정하는데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는 증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경직이라는 인물이 한국기독교의 지도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한국개신교 역사상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존재인 한경직의 성공스토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전쟁으로 사회시스템의 완전 붕괴상황에 놓인 한국사회의 재구성 과정에서 가장 막강한 사회세력으로 발돋음하는 계기를 맞이한 한국개신교 성공스토리의 중대한 계기적 사건이기도 하다. 즉 한경직 개인의 성공과 한국개신교의 성공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전쟁이 자리잡고 있다.”(김진호)

 

한경직의 성공스토리는 구호물품을 만나면서 더욱 빛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세계에서 구호물품이 답지했다. 한경직이 주도한 ‘대한기독교구제회’는 구호물품을 받고 전달하는 인프라라 되었다. 물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었고, 교회에 대한 충성심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경직 자신은 늘 타자에게 희생적이고 독설을 퍼부을 때조차 점잖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너무나 공격적이었고, 그런 공격성의 화신들에게 한경직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튼 영락교회는 경제적 생존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서 큰 매력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교단을 불문하고 무수한 개신교 성직자들과 교회들이 한경직과 영락교회를 선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여 전쟁과 전후 복구의 시간인 1950년대는 한경직과 영락교회의 시대였다. ”(김진호)

 

한경직은 역대 정부의 신뢰를 받았다. 1948년 신탁통치와 남한단독정부 문제를 두고 여론을 청취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했다. 미군정은 한경직을 개신교의 유일한 대표로 위원단과 면담하도록 주선했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켜 집권했을 때, 미국은 그의 남로당 전력 때문에 신뢰를 주는데 망설였다. 한경직은 특사자격으로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쿠데타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후 반공연맹(자유총연맹 전신으로 개신교가 설립을 주도) 임원 등을 맡아 군사정권을 옹호하였다.

 

한경직은 1975년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 1987년 10월 3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대성회' 등을 열었다. 여의도 광장에는 수십만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독재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기도를 했다. 1975년은 월남이 패망했을 때 였고,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다. 공산주의 위협 앞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기도회는 반공주의 정권에게 힘이 되었다.

 

한경직은 1989년 개신교의 정치참여를 행동으로 옮기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설립을 주도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전광훈 목사 등 많은 목회자들에게 한경직이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반공주의와 반북, 친미와 한미동맹을 성경 못지 않게 믿음의 가치로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원형과 DNA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한경직은 1950-1960년대 개신교를 대표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개신교의 특성을 만들어낸 존재였다. 하여 그는 이 시기 한국개신교의 절대1인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목사들의 롤모델이었고, 영락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의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한국개신교는 ‘한경직의 종교’였다고 과언이 아니다.”(김진호)

 

④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박정희 시대=개신교의 비약적 교세 확대, 새로 출현한 민중신학은 탄압받아 전두환 시대=불교계 정화에 나서고, 보수 개신교는 전두환 조찬기도회 열어

 

박정희는 어릴 적에 구미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모호했다. 육영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이승만 장면 처럼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유교 불교, 나중에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를 초대해서 의식을 치렀다. 박정희 시기를 특징지우는 것은 개신교의 비약적 교세확대이다. 조용기의 순복음 교회 등 초대형 교회가 만들어졌다. 또 한편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는 취약한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 적절하게 종교를 활용했다. 호국불교가 다시 등장한 것도 불교와의 관계 개선의 결과이다. 반공을 고리로 하여서는 개신교와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여서는 불교와 잘 지냈다.

 

박정희 시대에는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불편한 몇가지 조치가 있었다. 이승만은 국기를 ’성화‘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국가주의자인 박정희는 국기와 국가를 ’성화‘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국기하강식, 국민교육헌장,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연주 등이 박정희 시대에 늘 만나는 일상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오후 6시 국기하강식 애국가 연주가 나오면 전 국민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다. 숙연했다. 하루라도 애국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새벽종소리를 들으며 새마을운동을 하고 반공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단군 신전 및 동상 건립운동을 통해 단군 신화를 부활시켰다. 이승만이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인삿말을 했다면 박정희는 단군 성조로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개천절이 아니면 누구도 인삿말에 단군을 거론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대통령을 따라서 각종 훈화에서 단군을 거론하는게 유행이었고, 달력에는 서기와 함께 단기를 병기했다

 

박정희의 종교 중립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반공주의 개신교는 박정희의 쿠테타와 10월유신을 지지했다. 이미 기독교는 반공의 보루였고 박정희는 그 보루의 세속적 사령관이어서 개신교의 정교일치는 자연스러웠다. 5.16쿠테타를 군사혁명이라고 찬양했던 김준곤 목사는 대통령조찬기도회(1966)에 이어 국가조찬기도회를 잇달아 성사시켰다. 국가조찬기도회는 195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복음주의가 대통령을 포섭하기 위해 만든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회 부터 “링컨대통령과 같이 은총을 받는 사람”  “모세와 같은 능력으로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에게 지혜의 지팡이를 달라”는 기도가 이어졌다. 재선 고지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만족스러워 했다.

 

개신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대표 종교’의 외양을 얻는 효과를 얻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참여하는 조찬기도회는 고위공직자와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고 번성해 가면서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 사무실과 기관들을 짓기를 갈망한다. 정부를 비판하지 않아야 재산개발에 대한 승인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정부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면 눈에 띨 정도의 재산 증식이 빨라진다‘(진 매튜스. 당시 한국에서 선교했던 미국인 목사. News & Joy)

 

개신교는 초대형 대중 전도집회 등 많은 새로운 특권들을 얻어냈다. 반공주의와 개신교가 결합한 대형집회는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전국복음화운동(1965 김활란) 빌리 그래함 내한 전도(1973) 엑스폴로74(1974 김준곤) 민족복음화대성회(1977 신현균) 등 수십만명, 연인원 수백만명을 넘는 초대형 예배는 정권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했다. 교회의 반공 반북 신앙은 정권을 지원했다.  카터 대통령의 미군의 철수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가 마음을 돌리도록 하나님에게 기도로 호소했다

 

군 정신력 강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화운동(1969)에서도 개신교가 가장 과실을 많이 얻었다. 군대에서 개신교 장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김준곤은 10월유신을 정신혁명이라고 칭송했고, 전군신자화운동은 세계 기독교의 자랑거리라고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는 1976년 신앙전력화(信仰戰力化)라는 친필휘호를 군 부대마다 하달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군 부대에 좌익의 침투를 우려한 박정희는 반공을 신앙으로 하다 시피하는 개신교가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혁명 공약 제1조에서 반공을 첫번째 국시로 표명했다. 자유와 민주가 아닌 반공이 국시였다. 자유와 민주 수호의  결과물로써 반공이 아니라 반공이 우선인 것이다. 개신교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는데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악마', '붉은 용' 등으로 묘사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를 경과하면서 개신교의 선민의식은 한국이 세계 반공 전선 최전방에 서서 사탄과 아마겟돈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었다.

 

이승만 시대에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었다면 박정희 시대에는 조용기 목사가 새로운 별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너나 없이 “잘살아보세”라는 염원이 지배했다. 산업화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그 열망이 퍼져나갔다. 이 시대의 코드에 잘 맞는 것이 조용기의 번영신학이었다. 번영신학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 믿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번영신학적인 인사이다. 조용기가 교회의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변화이다. 조용기는 질병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법(기적의 은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도 조용기의 새마음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조용기현상’이 대유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제 많은 이들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를 롤모델 삼아 선망했고 모방했다.  조용기도 병든 몸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영의 구원이 별개가 아님을 주장했다. 여기에 하나 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갈망까지도 포함되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강변했다. 한경직은 이런 세속적인 갈망은 자칫 영적인 구원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그런 세속적 갈망이 무속적인 기복성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경직은 이런 신앙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김진호)

 

개신교에서 급속하게 번영신학이 전파되었다. 교회에서 한 설교를 기억나는대로 옮겨 본다. “여러분 성경말씀에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 했어요.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겠어요. 강남에 땅을 사는게 하늘에 재물을 쌓는 길은 아닙니다. 주식을 사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길은 어니예요. 땅금이 올랐는지, 주가가 내렸는지 분심이 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세요. 하늘에 재물을 쌓으세요.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줍니다.“

 

아멘으로 답하는 소리가 나오고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이 쌓인다. 교회에 순종하고 봉사하면, 목사에 충성하면 복이 내려온다고 믿게된다.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지금 내가 부자가 되고, 자녀가 성공하는 현세의 복부터 구하면서 기복신앙화된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기 위해서 기도가 부족한 남의 아들을 결과적으로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트린다는 사고가 어떻게 가능할까? 기도와 헌금의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현세의 복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고대 원시 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탐욕과 질투의 신과 다를 바 없다.

 

여하튼 박정희 시대는 개신교의 황금기이다. 무려 교회가 8배 성장했다. 지난 2013년 10월25일 박정희 추모예배에서 한 목사가 이렇게 축사를 했다. “독재니 어쩌니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한국은 독재해야 돼, 하나님이 독재하셨어.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셨어요”(News & Joy)  하나님의  독재는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박정희 시대의 개신교 부흥에 헌사를 바치고 싶어하는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불교에도 혜택을 주었다. 종파교회제도(宗派敎誨制度) 도입을 통한 교도소 포교 참여, 군종제도(군 법사. 1967) 참여를 가능게 했다. 이승만이 형목과 군종을 기독교에만 개방했는데 박정희는 더 넓게 문을 열었다. 1975년 불탄일을  공휴일로 하여 불교계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사찰입장료(문화재관람료) 징수를 허용하여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대적 불교문화재 복원사업(1962 불교재산관리법 제정)을 지원하고, 새마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었다. 

 

박정희가 이처럼 공을 들였지만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교계 정화‘에 나섰다.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과 3만여명의 군병력이 전국 6000여개 사찰에 난입하여 2000여명의 스님들을 강제 연행했다. 전국 10·27법난은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신군부세력이 요구한 전두환 지지표명을 거부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보수개신교는 1980년 8월6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조찬 기도회를 열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와에 비교하며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가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 였다.

 

당시 기독학생들은 양희은의 ‘금관의 예수’를 부르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텅 빈 얼굴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박정희 시대에는 산업화에 따른 양극화, 독재통치에 따른 인권탄압으로 진보주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면서 정권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안병무 문익환 목사 등이 민중신학 이론을 제공했고 도시민빈선교회 YMCA 기독학생운동 등이 에큐네미칼운동으로 연대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출애굽기의 출애굽성화, 갈릴레이의 민중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민중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담지자라고 보았다. 개신교 에큐메니칼운동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역할을 하고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위기의식을 가져오면서 새로운 역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미국의 복음주의 근본주의를 살펴본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⑤ 미국의 근본주의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근본주의와 굳건한 교회동맹 맺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2024대선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개신교 근본주의 이들은 누구일까? 미국의 근본주의는 어떻게 해서 한국에 수입되었을까? 근본주의는 왜 정치에 개입할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과 미국의 개신교, 그리고 정치를 들여보아야 그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남북전쟁 (1861-1865)이전까지만 해도 큰 도전을 몰랐다. 자원은 풍부했고 국토는 넓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알래스카에서 루이지애나까지 국토가 확장되었다. 영국과 서유럽 보다 넓은 영토에서 종교의 낙원을 찾아 이민을 온 그들에게 미국은 하나님의 약속된 땅으로 , 미국인은 선택받은 국민처럼 생각되었다. 주님이 미국을 선택하고 여기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명백한 운명’을 믿었다.

 

남북전쟁은 큰 시련이었다. 최초의 큰 아픔이었다. 신앙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전쟁의 결과, 흑인노동자들이 북으로 대거 이주하고 실업과 슬럼가 등 도시화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났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펴냈다. 창조론을 믿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이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남북전쟁과 진화론은 미국인들이 갖고 있었던 낙관론을 흔들었고 시대적 상황은 비관론에 빠져들게 했다.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성서비평학이 만들어지고 미국으로도 전달되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등을 반영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화론과 함께 성서비평학은 기존의 신앙을 뒤흔드는 도전이었다.

 

프린스턴대학을 중심으로 미국 개신교가 답을 찾았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성경의 무오설(무오류설) 즉 복음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말씀에 따르면 종말이 다가오고 있고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 예수가 재림하며 선과 악의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에 의인들은 들어올림(휴거)를 당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 이에 대비할 수 없으니, 사회변화로는 해결이 안되니 성령에 의탁하고 선교로 성전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서비평학 같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사회개량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선교, 행동주의를 촉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엘리트들이 전세계로 나가 신앙을 전파했다. 

 

미국인은 70%기독교를 믿는데 그중 개신교는 50% 가톨릭은 20% 정도가 된다.(2021)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전체 기독교인의 81%이다. 그 중 오론쪽에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중간에 광의의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나머지 20%는 자유주의 진보주의적인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미국 기독교는 1940년 49%였는데 2차 대전 이후에 급격히 늘어났다. 기독교가 냉전에서 사탄과 싸우는 도구화하면서 급증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 부흥회에서 세계적인 부흥사로 발돋움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되면 뉴욕 시카코 다음에 LA가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고 설교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것은 기도 덕분이라며, 하나님께서 생존이냐 멸망이냐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주었는데 소돔과 고모라 처럼 되지 않을려면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1957년 뉴욕에서 열린 그의 부흥회에는 97회 설교를 하는 동안 3백만명이 참여했다. 에덴동산에는 노동조합도, 노조지도자도 살지 않았다고 하여 자본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1966년부터 2년간은 베트남에서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여 닉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으로 왔다.

 

무늬만 기독교 신자였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빌리 그래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회귀해야 하고 자신이 이를 위해 미국인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출마했다고 밝혔다. 1953년 1월20일 취임식에서 기도를 올린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고 백악관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복음주의 1세대의 분리주의에서 벗어나 1940년대에 서부에 독자적인 신학대학을 설립하는 등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1960년-1970년대에 미국은 가치관에서 여러 변화를 경험한다. 원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공립학교에서 흑백인종의 통합등 새로운 이슈가 터지면서 “하나님의 가치에 맞서 인간들이 멋대로 가치를 결정하는 세속적 인본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생겨났다. 이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에 나서 1979년까지 백인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를 5000여개 만들었고 홈스쿨링을 보급했다. 인종분리폐지는 사탄의 행위이고 소련의 개입이라고 선전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볼 때 미국은 온갖 형태의 세속인본주의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공교육의 세속화, 환경운동, 포르노, 동성애, 페미니즘으로 미국은 타락하고 있다고 보았다. 1979년 6월 ‘도덕적 다수’라는 3세대 근본주의 그룹이 결성된다. 그들은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고 우파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설득했으며, 우파후보와 당선인들이 근본주의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또 창조박물관 등 온갖 관련문화를 만들었다. 

 

1980년 공화당 후보인 레이건은 복음주의 신자는 아니었다. 반대편에 있는 지미 카터야 말로 신실한 복음주의자였다. 기독교우파에서 보면 카터는 자유주의자여서 지지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레이건을 설득해서 회심하게 했다. 전직 배우인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 지도부를 만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연출했고, 기독우파는 그들이 꿈꾸던 대선 후보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조지 H. 부시도 지지를 했는데 레이건과 부시는 당선이 되고나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본 클린턴이 당선이 되어 성추문으로 백악관을 오염시키는 것은 물론 온갖 세속적 인본주의로 미국을 타락시켰다며 분노했다.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최적의 후보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9.11테러가 올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예비한 후보였다고 그들은 말한다. 국민투표에서 지고 선거인단에서 승리한 것이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증거라고 했다. 부시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외치며 국가의 일인 복지서비스를 교회와 기독교자선단체에 위임했다. 복음주의 목사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그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기관에 유대인 동성애자의 채용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당하고만은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트럼프가 나타났다. 트럼프는 기독교우파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트럼프는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이 이교도를 통해서도 역사한 선례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죄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통해 뜻을 펴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집권 4년 동안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등 약속한 것을 실천했다. 트럼프는 시련을 거쳐 다시 나타났다. 2014년 대선 와중에 그가 총격을 받았는데 살아났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은 굳게 믿었다. <빌 그래함 부터 트럼프 까지는 ‘The Christian Right, the Republican Party and Donald Trump’(존 뉴싱어)에서 ’노동자연대‘ 번역문에서 참조>

 

한국의 개신교는 태생부터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받았다. 한기총 부터는 미국의 ‘도덕적 다수’ 등 근본주의와 궤를 같이 했다. 동질화율이 가장 높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그리고 탈냉전 이후에는 테러리스트, 북한등 악의 축과 늘 대립했다. 악마와 사탄이 있어서 세계의 경찰 역할에 국가의 재정과 국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와 북한을 80년 가까이 대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이 동질화율이 높 은 이유이고, 한국의 개신교보수파와 미국의 근본주의가 굳건한 교회동맹을 맺게 된 이유이다.

 

⑥ 태극기 집회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37차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의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한다“

 

KNCC 통일선언은 민족분단의 고통을 경험한 독일 교회의 우정어린 조언과 1970년대 부터 통일을 고민한 기독교인들의 오랜 고민과 논의의 결과물이다. 평화의 종으로 이 땅에 온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믿음에 기반했다.

 

반공과 반북, 한미동맹을 DNA로 하여 성장한 보수주의 개신교는 통일선언을 결별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남북화해 및 긴장완화, 주한미군의 궁극적인 철수 등의 실천사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보수교단을 망라하여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근본주의 단체가 출범했다. 20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탈퇴, 2019년 전광훈의 한기총 회장 당선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보수주의 정치운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센 물결 앞에서 지리멸렬했던 보수교단은 한기총의 등장으로 정치세혁화한다. 성속이원론을 폐기하고 정치참여노선을 채택한다. 재정위기에 처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을 압도한다.

 

김대중 정부 말기, 노무현 정부 초기에 대북화해정책, 효순·미선사건으로 인한 반미시위를 보면서 반공주의에 기반했던 개신교는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친북좌파정권과 그 세력이 이 사회를 지배했다고 보고 정치적 행동에 나섰다. 2003년 1월 서울 광장에서 시국기도회를 잇달아 연데 이어서 기독당을 결성하여 2004년 총선에 참여했다.

 

개신교 우파, 기독 뉴라이트는 노무현 정부의 4대개혁 입법을 반대하고 좌절시키면서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았다. 보수언론과 사학재단, 개신교가 사립학교법 국가보안법 개정에 맞섰다. 결국 열린우리당을 분열시켰다.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면서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 장로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2004년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는데에 측면 지원을 했고,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10년 이내에 1만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겠다며 탈북자단체를 지원했다. 대북전단살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에 뉴라이트도 함께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극우적 개신교 시민단체의 결성에 나섰다. 개신교 우파는  한국 극우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고 공급처이자 운동주체가 된다. 북한 이슈에서 동성애자 이슈까지 전선을 확대하여 전방위적 역사전쟁, 문화전쟁을 벌여나간다.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와 진보적인 의원들이 제기했던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조장법이라고 본질을 왜곡한다. 법안이 통과되면 목사가 설교 중에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해도 교도소에 가게 된다며 종교탄압 프레임을 붙인다.

 

처음에는 에스더운동이라는 소수단체에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세를 불린다. 나라사랑학부모회,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과 같은 단체가 출범한다. 미국의 ’도덕적 다수‘가 성교육을 금지하고 순결교육을 하자는 캠페인을 했던 것을 한국에서도 전개한다. 2016년 21개 교단이 뭉쳐서 ’한국교회 동성애 대책협의회‘를 구성한다. 이런 운동의 와중에 종북딱지가 만능이 되었다. ‘종북게이’(성소수자 좌파) 처럼 종북=게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이데올로기적 공격이 만연한다. 

 

퀴어축제 반대에 나선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라며 회개를 촉구한다. 차별반대법은 18대 국회 진보당에서 재차 발의한데 이어  19대 국회에서 민주당의원 66명도 입법안에 동의했다. 2013년 유엔인권이사회까지 권고했지만 보수교단에서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하면서 법안을 스스로 철회했다.

 

자신감을 가진 개신교 보수는 전선을 확대한다. 한국 내 무슬림의 세 확대를 경계하고 양심적병역거부 난민 등 소수자 인권신장에 반대한다. 성직자 납세등  제도적 이익을 수호하면서 이를 종교탄압이라고 한다. 실제로 과세대상이 되는 목사는 전체의 5% 이내이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제어할 수 없는 교회 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자 마자 난민이 되었다. 왕이 태어난다는 동방박사의 말에 헤로데가 전 이스라엘의 신생아를 모두 죽이라고 했는데, 천사의 안내로 마리와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신한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개신교인들은 난민의 수용을 반대했다. 이슬람이 들어온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개신교 우파의 목소리와 영향령이 가장 컸을 때였다.

 

“도덕적 자유주의자들의 손가락질에서 비롯된 수치심과 피해의식과 분노,그런 수치심을 자존감으로 전환시켜주려는 강렬한 감정의 문화전쟁”(한국개신교의 보수적 시민운동. 강인철)이 중요한 동인이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와 2005년 조사를 비교해 보자. 개신교는 10년 사이에 125만명이 늘어나 967.6만명, 19.7%로 최대종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교세를 확장한 곳은 개신교 뿐이었다. 통계청은 1985년부터 매 10년 마다 국민들의 종교 분포를 조사하고 있다. 불교는 296.9만명이 줄어든 761만명으로 15.5% 가톨릭은 112.5만명이 줄어든 389만명으로 7.9%였다. 

 

세계 50대 대형교회를 꼽으면 한국 교회가 한때 23개를 차지하고 있다.(1993년 기준) 금란교회 광림교회 성락교회 중앙연세교회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은혜의진리교회 등이다. 세계초대형교회 통계(2024 Global Megachurches/Warren Bird)로는 아시아 142개 교회 중에서 32개가 한국교회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이 되었다.”(손석희)

 

대형교회가 많은 것이 과연 축복이냐는 데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개척교회가 있고 자립교회 중견교회가 많은 것이 건강한 생태계이다. 번영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축복을 내리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대형교회는 버스까지 동원하여 성도들을 자기 교회로 모이게 한다. 대형교회가 종교의 골목상권을 침범하면서 개척교회와 소형교회는 문을 닫는다.

 

한국은 해외선교도 세계 제일이다. 2023년 한국선교사는 세계 174개국에 2만 3318명이다.(한국 세계선교협의회, 한국선교연구원 보고서) 한기총 설립 이후 공격적으로 해외 선교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 2006년 커버스토리에서는 한국이 2위였으나 2010년 고든콘웰신학교 국제기독교 연구소 통계로는 미국 12만명, 브라질 3만4000여명에 이어 6위로 랭크되었다.

 

인구사회학적으로 한국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개척이 가능하지 않다. 노무현 김영삼 시절에 신학대학이 늘어나고 안수를 받는 목회자들을 한국에서 수용하기가 힘들어졌다. 저출산 고령화로 선교의 대상이 줄어들었다. 해외 파송에서 길을 찾았다. 미국과 함께 세계 선교를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과 한국 개신교에서는 근본주의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불교국가, 이슬람국가, 중국, 이스라엘에까지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충돌이 잦을 수 밖에 없다.

 

2016-2017년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다시한번 총집결을 했다. 태극기 부대를 형성했다. 성조기 이스라엘기 일장기까지 동원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당혹감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당시 1960-1970년대 이른바 명문고 동창들이 졸업회수별 깃발을 들고 나오는 현상은 기득권층의 인식이 경도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헌법적 가치를 누구 보다 체득했어야 할 지배엘리트들이 박정희 향수와 반공주의로 평생을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촛불이 승리하고 진보정권이 출범했으며 10년 보수정부는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보수개신교는 절치부심하여 2022년 윤석열 정부를 출범하는데 기여했다.

 

영적인 전쟁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전투적 기독교,  종북 좌파 동성애로 종말이 다가왔다며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유포하는 근본주의적 신앙, 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 아마겟돈이 다가왔다며 적그리스도와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는 정치적행동주의는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등의 전광훈 목사의 발언이 알려지고 MZ세대의 무관심에 부딪히면서 내용적으로는 신앙의 이탈자가 많아지고 있다.

 

그들이 절치부심하여 만든 윤석열 정부는 역대급 인기없는 정부가 되었다. 신앙의 위기에 부딪혔다는 인식이 있으면 교회의 쇄신이 필요한 것인데 70년된 한국교회의 반공DNA는 변하기를 거부한다. 김정은과 핵무기가 있는 이상, 다시말해 사탄이 있는 한 그들의 영적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신앙이 형성된 탓이다.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예수가 창녀와 문둥병환자, 사마리아인을 포용했듯이 이 시대의 소수자와 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시대의 땅끝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탄압받는 이들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포용이다. 북한의 동포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땅끝이다. 2000년전에 이 땅에 평화로 온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평화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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