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이슈산책] 국민통합은 무엇인가, 이재명의 국민통합은 가능한가?(1) 김대중의 국민 통합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역대 대통령이 모두 국민통합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결이 약간 달랐다. 김대중은 정치보복 없는 정치를 국민통합으로 생각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와 지역균형발전을, 박근혜는 경제민주화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통해서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했다. 문재인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이재명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국어사전까지 찾아봤다고 한다.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국어사전을 뒤져서 찾아봤다. 국민을 크게 통합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가 있더라. 계모임 계주든 동창회장이든 대표는 그 공동체가 깨지지 않게 화합하며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무이다. 일단 동창회장으로 뽑히면 어느 마을 출신이든, 자기를 지지한 회원이든 지지하지 않았던 회원이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공동체 자체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와 경쟁은 하더라도 대표 선수가 선발되면 작은 차이를 넘어 국민을 하나의 길로 이끄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갈가리 찢어지지 않도록 통합을 해 나가야 한다. 저는 민주당의 후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 국민의 후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정치는 상대와 다른 점을 찾아 경쟁하면서도 함께 지향할 공통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은 하되 공동체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고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통합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 가인데 그는 명확하게 정의했다. “민주주의 복원이 국민 통합의 길이고, 성장 회복과 격차 완화가 국민 통합의 길”이라며 “불평등과 절망, 갈등과 대결로 얼룩진 구시대의 문을 닫고 국민 대통합으로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피력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성장회복과 격차 완화라는 것이다.
① 김대중 –정치 보복하지 않는 통합의 정치 구현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인동초, 김대중은 화해와 용서를 신앙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적, 박정희를 용서했다. 자신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씌워 사형을 하려했던 전두환 노태우도 사면했다. 피해자인 그가 나서서 가해자들을 용서할 때 국민통합이 된다고 보고 직접 실천했다.
김대중은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분명하게 단언하고 약속했다.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취임 직후 자신을 도쿄로 납치한 뒤 바다에 떨어트려 수장시키려 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해외망명할 필요가 없다며 한국에서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라고 전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는 바입니다. 국민의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김대중은 1980년 9월 13일 육군본부 군사 재판정에서 그와 함께 구속된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했었다. 사형 구형을 받고 나서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정치보복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인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김대중은 사형수 시절인 1980년 12월 3일, 서울구치소에서 쓴 옥중 편지에서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용서를 강조했다.
"나는 나의 그리스찬으로서의 신앙과 우리 역사의 최대 오점인 정치보복의 악폐를 내가 당한 것으로 끝마쳐야겠다는 신념을 1976년의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된 후 굳게 하며 그 이후에 일관했다...지금 나를 이러한 지경에 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어떠한 증오나 보복심을 갖지 않으며 이를 하느님 앞에 조석(朝夕)으로 다짐한다“
그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철학은 단순한 정치 수사가 아니다. 미국 망명중인 1983년 3월 5일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에서 ‘민중의 한과 우리 세대의 사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을 동원해서 한의 승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민중의 한은 원한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로써 풀리지 않습니다. 그 소망의 성취로써만 풀립니다. 우리 민중의 한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는 판소리입니다. 이 판소리는 가장 우리 민중의 한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의 한은 결코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고 감옥에 들어가서 곤장을 때리고 수청 안 든다고 해서 박해한 신관 사또 변 사또에게 보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암행어사 출두해서 이몽룡이가 춘향을 석방시킨 후에도 변 사또에 대해서 춘향이로 인해서 보복하지 않습니다. 다른 탐관오리로서의 조건 때문에 봉고파직 하는 것입니다. 춘향이의 한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 도령과 맺어짐으로써 풀립니다. 보복으로써 풀린 것이 아닙니다.
심청이의 한은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들어가지만 하늘의 옥황상제가 이것을 기특히 여겨가지고 심청이를 구출합니다. 황후가 되게 만듭니다. 황후라면 여자로서는 최고의 부귀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심청이의 한은 풀리지 않습니다. 왜, 심청이의 한은 아버지가 눈 뜨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봉사 맹인잔치를 해가지고 아버지가 눈을 뜰 때 비로소 심청이의 한은 풀립니다.
흥부는 자기가 배고팠던 그 생활로부터 해방돼서 제비가 갖다 준 박에 의해서 부자 됨으로써 족합니다. 자기가 부자가 되고 나서 자기를 그렇게 박해했던 형에 대해서 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재산을 나눠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국민의 한은 좌절된 소망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성취하도록 노력해서 그 성취를 통해서 풀리는 것이지 결코 보복이라던가 원한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민중이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을 집약하면 국토의 분단과 독재정치인데 우리의 한은 우리 땅에서 독재정치를 종식시키고 갈라진 두 동강의 나라를 하나로 합쳐서 남북이 통일될 때만 우리 민중의 한은 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다섯 가지 한. 통일에 대한 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독재에 대한 한, 군인들의 정치개입에 대한 한,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현실에 대한 한, 그리고 민권기관의 좌절에 대한 한. 이 한을 풀어야 합니다. 이 한을 푸는 것이 오늘의 우리 민중이 구원받는 길이고 이 한을 푸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인 것입니다. 이 한을 푸는 거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광주에서 죽은 우리 영령들의 한, 광주 한은 이제는 광주에서 죽은 광주사람만의 한이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한이오, 양심을 가지고 있는 온 세계의 한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도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한을 푸는 것도 이 모든 것이 광주 한을 푸는데 우리가 집중함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광주의 한을 푸는 것은 광주의 사람들에게 총질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내가 한에 대해서 여러분께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광주의 민중들이 가슴에 품고 죽었던 그 한,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에 살고 싶다, 인간이 인간 대우를 받는 나라에 살고 싶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죄악된 나라를 후손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죽어간 그 광주 한을 민주회복을 통해서 풀어주는 것만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정부와 국민 모두가 다 같이 구원받고 서로 화목하고 서로 단결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싶습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을 지원했고 박정희기념사업회 고문도 맡았다. 김종필은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대해 증언했다. 김종필이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을 지원할 때도 약속받은 사안이었으나 김영삼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반면에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 200억 원을 책정해 기념관 건축공사에 착수했다. 김대중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박정희 묘역도 참배했다. 뉴DJ플랜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진정성도 있었다.
“1997년 10월 27일 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와서 ‘김 총재님, 대선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따지고 보면 총재님(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과 한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첫째, 내각제 개헌을 꼭 해주십시오. 또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하나 세워주십시오.’ 디제이는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라며 흔쾌히 약속했다.”(김종필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1999년 5월 13일 박정희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방문해 대구·경북 핵심 인사 30여명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는 면담에 앞서 할 얘기를 노트에 정리했다.
1. 10·26 사태 시의 나의 소회 – 생전에 대화 못 한 것
2. 79년 봄의 나의 (박정희) 면담 요청 - 성공하는 대통령
3. 누구나 생전에는 찬반의 대상 - 나의 입장은 반대 무
4. 우리는 한국 정치의 두 축
5. 박 대통령 이룬 경제적 근대화 부인 못해. 국민적 공감대
6. 전직 대통령은 부정의 대상, 이제 처음으로 존경과 평가의 여론이 우세, 하면 된다는 자신감
7. 기념사업 위해 애쓴 기념사업회에 감사
8. 정부도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5조의 ‘기념사업의 지원을 할 수 있다’에 의거 지원 불석(不惜·‘아끼지 않는다’는 뜻)
9. 92년 출마 시 묘소 참배해서 화해, 그때는 선거 시, 이제는 출마 없다. 진정한 화해의 심정, 오늘 저녁 참으로 뜻깊은 밤
10. 서로 미워하고 싸우던 적대 - 과거를 훌훌 털고 화해
11. 여러분도 화해의 대열에 동참 -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보고하자
(‘산 김대중’은 ‘죽은 박정희’를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했을까. 박찬수의 DJ 국정노트에서 재인용)
김대중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인 2004년 8월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했다. 박근혜는 김대중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한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린다. 재임 중 기념관 문제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에 감사드린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김대중은 "내 속에 있는 무슨 응어리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시대 맺혔던 원한을 따님이 와서 풀고 한 것에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대중은 2006년 3월 21일 박정희가 세운 영남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대중 비서관을 지낸 국회의원 최경환이 쓴 '김대중 리더십'에서 이날의 모습을 가리켜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고 표현했다.
넬슨 만델라는 과거사 문제를 다루면서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원칙을 내걸었다. 그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흑백통합이 필요하고, 백인들의 지식·기술·자본을 끌어안고 관료체계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흑인들의 반발을 무릅써가며 백인 세력을 끌어안았다.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세웠다. 진정한 화해는 진실 규명 위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진실을 파헤쳤다. 한국과 중남미 국가에서 진실 규명의 모델이 되었다. 목적은 처벌에 있다기 보다 화해에 있었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했다. 재임 기간 중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관저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했다. 전직 대통령을 모두 모아서 식사를 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노태우는 죽기 전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그의 아들도 사과했다. 전두환은 사과를 하지않고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의 망상계엄을 접하고 다시 전두환의 사면 복권에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김대중은 국민통합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나에게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나는 역사 안에서 절대로 국민은 패배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사실 이렇게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것은 나 자신의 용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다. 그러나 국민을 믿는 신념이 있었기에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명박이 집권한 지 얼마 안되어서 노무현이 서거했다. 일생동안 정치보복을 반대해 온 김대중은 노무현 소식을 들은 후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고 민주정권 10년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서 김대중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일기장 마지막에 한마디로 삶을 정리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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