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식탁이야기(49)] 영화 ‘더 저지’로 돌아보는 부모와 자식 관계…갈등과 치유 이야기
김연수 전문기자 입력 : 2025.05.10 07:15 ㅣ 수정 : 2025.05.11 23:20
가족 구조‧역할 바뀐 현대 사회에 가족 간 정서적 거리 멀어져 더 저지, 대화‧용기‧진심어린 마주침 통한 관계 회복 과정 다뤄
'더 저지(THE JUDGE)' 영화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뉴스투데이=김연수 전문기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차례로 이어지는 이 시기엔 자연스레 가족이라는 이름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때로는 그래서 더 상처 주고 오해하기 쉬우며. 서로를 원망하거나, 무심히 살아가는 관계도 드물지 않다.
흔히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천륜(天倫)’이라 말한다. 하늘이 맺어준 관계이자, 인간의 뜻으로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서로를 의지하며 따뜻하게 살아가는 가족도 있지만, 반대로 오랜 갈등과 상처를 껴안은 채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도 많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DNA는 외모나 건강뿐 아니라 성격, 감정, 행동의 패턴까지도 복사된다고 한다. 결국 우리 안에는 부모의 말투, 사고방식, 두려움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누군가 부모를 미워하고 끊어내며 살아간다면, 이는 곧 자신 안의 일부분을 밀쳐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정은 삶 전체를 무겁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기 어렵게 한다.
심리학자 존 가트맨은 “부모의 마음은 자식의 모든 것을 보듬어 주는 저수지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 저수지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거나, 흙탕물처럼 뒤흔들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물이 마르기 전에, 고맙다고 한마디 전하거나,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시작일 수 있다.
가정 안에서 형성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 자존감, 감정 조절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애착 이론’을 창안한 존 볼비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안정적 애착 경험이 이후 삶의 심리적 건강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 보았다. 특히 어머니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유대도 감정적 안정, 사회성,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가족 구조와 역할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맞벌이 가정의 증가, 1인 가구 확산, 비혼과 비출산의 가치관 등이 복합되며 부모와 자식 간에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은 줄어들고, 정서적 거리는 더 벌어지기도 한다. 자녀는 디지털 기기와 더 친숙하고, 부모는 변화된 세상에서 자녀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며 갈등이 생긴다.
영화 '더 저지(THE JUDGE)'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이런 맥락에서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더 저지(The Judge)’는 부모 자식 관계의 애증과 회복을 그린 드라마다. 성공한 변호사 헨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부와 명예는 가졌지만, 가족과는 단절된 채 살아간다. 어머니의 부고를 계기로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간 그는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증오에 가까울 만큼 멀어진 상태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헨크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변호를 맡는다. 법정에서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두 사람은 수십 년간 묻어 두었던 오해와 상처를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알고 보니, 젊은 시절 사고를 쳤던 헨크를 아버지는 직접 소년원에 보냈고, 그 죄책감은 또 다른 재판에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졌다. 이 선택은 비극을 낳았고, 아버지는 이후 아들에게조차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함께 부딪히고 도우며 보내는 시간은 헨크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된다. 영화는 낚싯배에 나란히 앉아 있던 부자의 장면으로 절정을 맞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변호사는 바로 너다” 그것이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고, 헨크는 그 한마디로 마침내 자신이 바랐던 사랑과 인정을 비로소 얻게 된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골이 아무리 깊어도, 이해와 회복의 여지는 남아 있다는 것. 하지만 그 회복은 대화와 용기, 진심 어린 마주침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정이란 때로는 익숙함 속에 숨어 있는 침묵의 공간이다.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존재들이 어느 날 사라지고 나서야,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흔하다. 특히 부모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착각 속에 자식을 품지만, 그 침묵이 오해가 되기도 한다. 자식은 “아직 기회가 있겠지” 하며 무심히 흘려보내지만,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5월은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보기에 좋은 시기다. 미워했던 마음, 참아왔던 감정, 전하고 싶었던 고마움. 그 어떤 것이든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단 한번뿐인 천륜이다. 인생이라는 시간표 안에서 너무 늦기 전에, 서로를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길이 아닐까 싶다.
◀ 김연수 프로필 ▶ 연세대학교 아동가족학 학사 / 前 문화일보 의학전문기자 / 연세대학교 생활환경대학원 외식산업 고위자과정 강사 / 저서로 ‘4주간의 음식치료 고혈압’ ‘4주간의 음식치료 당뇨병’ ‘내 아이를 위한 음식테라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