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기자 입력 : 2025.05.22 00:20 ㅣ 수정 : 2025.05.22 18:25
세계 1위 CATL을 필두로 BYD, CALB, EVE에너지 등 다수의 중국 배터리 기업들 글로벌 10위권 진입, 반면 한때 전세계 시장점유율 절반 차지했던 K 배터리는 40%로 감소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중국의 CATL이 20일(현지시간) 홍콩증시 상장식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투데이=정승원 기자]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확연한 구조 변화를 맞이했다. 그 중심에는 중국의 CATL이 있다. 중국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전반에서 CATL은 굳건한 1위를 차지하며 무서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3대 배터리 기업(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이 한때 50% 이상을 차지하던 세계 시장 점유율은 현재 40% 선까지 밀려났고, 중국 업체들에 추월당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CATL은 2023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배터리 출하량의 약 36%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CATL은 테슬라, BMW, 현대차 등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넓혀왔다. 원재료 내재화, 기술 고도화, 정부의 강력한 산업 육성 정책이 삼위일체가 되어 중국 배터리 산업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중국 정부는 ‘신에너지차(NEV)’ 확대를 위해 배터리 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이어왔다. 이에 따라 CATL뿐만 아니라 BYD, CALB, EVE에너지 등 다수의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글로벌 10위권에 진입했다. 미국 시장에서 규제로 인해 중국 기업들이 제약을 받는 사이, 이들은 유럽과 동남아, 중남미 등 제3지역에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국제 에너지 분석기관 벤치마크 미네랄 인텔리전스의 사이먼 무어 CEO는 “중국 기업들의 빠른 배터리 기술 축적과 자체 공급망 확장은 과거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던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 역시 미국 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K배터리’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려 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GM과, SK온은 포드와 각각 합작법인을 세우며 북미 배터리 생태계를 공략해 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맞물려 전기차 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전부터 “그린 뉴딜을 폐지하고 전기차 의무화를 중단하겠다”고 천명하며, 미국 내 전기차 보조금 정책이 후퇴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미 GM과 포드 등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 투자 축소 및 일시 중단을 발표하며 배터리 수요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예상보다 빠른 수요 둔화에 직면했다. 유럽 시장 역시 중국 기업의 ‘가성비 공세’에 밀리며 점유율이 급락했다. 실제로 유럽 내 중국산 배터리 점유율은 3년 새 3배가량 늘어난 반면, 한국산 배터리는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요 둔화, 보조금 축소, 가격 경쟁력 하락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한 한국 배터리 3사는 현재 ‘생존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생산 속도 조절, 투자 계획 재검토, 비용 절감 등 비상경영에 들어간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하에서 보조금을 반영한 실적에서는 흑자를 기록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삼성SDI와 SK온도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북미 신규 공장에 대한 투자 회수 기간이 불확실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소한 미국 정부의 확실한 정책 방향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보수적 경영 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규모와 기술만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배터리 원재료(리튬, 니켈, 코발트 등)에 대한 안정적 공급망 확보, 소형 모듈 기술 및 BMS(배터리관리시스템) 기술 고도화, 에너지 저장장치(ESS) 등 신시장 다변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좁혀진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프리미엄 전략’과 동시에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연구개발(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국내 배터리 소재 기업과의 협력 체계 구축, 산업 생태계 전반의 리질리언스(복원력) 강화를 위한 정책적 개입이 요구된다.
미국 워싱턴 소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사라 리우 연구원은 “한국은 전기차 시대 초기에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산업 전체의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위해서는 공급망, 정치 리스크 대응 전략까지 종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산업정책, 외교 전략, 공급망 통제까지 총체적 역량이 맞부딪히는 국면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의 공세와 미국의 불확실한 정책 환경 속에서 한국 배터리 산업은 생존과 도약의 갈림길에 서 있다.